뭐든지 자기로만 꽉꽉 채우지 않는 사람. 함께 있는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빈 공간을 두는 사람. 그래서 기꺼이 곁을 내주는 사람. 적어도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주는 이는 되고 싶지 않다.
자기로만 채워진 사람과의 대화는 공허하다.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면 응당 두 가지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런데 도통 소리가 하나밖에 안 들릴 때가 있다. 1인극을 보러 온 청중의 역할을 억지로 도맡은 기분이 든다.
내가 받아들인 침묵은 자유이다. 타인을 위한 능숙한 배려이다. 암묵적 강요로 떠안은 침묵은 구속이다. 곤혹스러운 노역이다. 나는 이 대화가 어서 끝나길 바란다. 시계를 힐끔 바라본다. 시간의 꼬리가 그날따라 유독 느리게 끌려간다.
미술학원에서 알게 된 긴 머리의 A가 떠오른다.
20대 초반까지는 종종 만나다가 그 뒤로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그 애와 있을 땐 늘 한 가지가 궁금했다.
애는 지금 누굴 보고 이야기하는 걸까?
절대 답을 기다리지 않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관통한다. 하긴 애초에 '답정너'인 거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어쩌다 내가 얘기라도 할라치면 A는 눈빛부터 뒤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초롱초롱하던 눈을 온데간데없이 감춰버렸다.
'빨리 끝내라. 나 아직 할 말 남았으니까'. 풀린 눈으로 나에게 소리 없는 메시지를 던졌다. 아주 형식적인 반응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시종일관 무반응이었다. 그 당시나는 소심했던 터라 주눅 든 채로 서둘러 말을 끝맺고는 했다. 참는 게 능사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기 안에 고스란히 쌓여갔다.
'아 이걸로 끝이다, 애하고는'. 여느 때처럼 꾸역꾸역 밀어 넣으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속에서 그 애의 말과 내가 못한 말들이 뒤죽박죽 섞였다. 집 돌아가는 길에 나는 기어코 탈이 나고야 말았다. 그래도 끝이라는 단념으로 게워내니 속은 시원했다.
B와의 대화도 비슷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빈틈이 부재했다.끼어들 틈은 아무래도 찾기 어려웠다. 예의 그 '티키타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뭔가에 안달이 나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루 이틀을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만나면 늘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바빴다. 키를 맡긴 적도 없건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선장이어야만 직성이 풀리나 싶을 정도였다. 어쩔 땐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나 좀 알아봐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같았다(물론 아이는 귀엽기라도 하다). 그런데 B는 어른이었다. 어른은 어른의 대화를 해야 재밌다.존중과 공감이 없는 대화는 맥이 빠진다. 주고받는 장단이 있어야 맥이 끊기지 않고 흐른다.
하나의 음성만 들릴수록 다른 하나의 마음은 비어져간다.
난 그의 새로 이사 가는 집 냉장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던 거 같은데. 전 직장 상사가 자신을 너무 예뻐해서 여기저기에 소개해준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거절했단 얘기는 몇 번 들었더라. 한두 번이야 얼마든지 들을만하다. 그 정도는 재밌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는 자랑 레퍼토리는 청자를 점점 질리게 한다. 화자 본인에게도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질릴수록 매력은 떨어진다. 왕년의 자랑만 주야장천 늘어놓는 사람은 영 멋이 안 난다. 만날 맛도 안 난다.
김하나 작가의 저서 <말하기를 말하기>에는 '에너지 뱀파이어'가 나온다.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올로프가 만든 용어이다.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빼앗아 자기 기력을 채우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 A와 B가 바로 뱀파이어였다. 둘이 있건 여럿이 있건 늘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고는 못 배기는 애정결핍 흡혈귀이자 어른 아이였다.
주고받는 맛이 대화의 낙이다. 맛없는 대화는 피곤하다. 기만 쑥 빨린다. 차라리 왕창 쓰거나 매운 게 낫다. 맛이 난다면 최소한 내가 과연 살아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내가 지금 인간 병풍인지 마이크인지 쓸데없이 헷갈려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내 세상의 주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두 사람이 만나 두 세상이 어우러져 있는 동안엔 주인도 두 명이다. 타인의 주권을 내 마음대로 빼앗아 버리는 건 침범이다. 우리는 주인답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대화는 연설이나 강의가 아니다. 대화에서 우리는서로의발언권을 존중해야한다.
강원국 작가는 <어른답게 말합니다>에서 대화를 잘하는 방법들에 대해 얘기한다. 여러 기술적인 방법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주어야 받을 수 있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한다. 잘 들어야 잘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