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ESHOOP 리슙
May 27. 2022
쉽게 쉽게 글 쓰려 마음먹어도 마음 어지러워 쓰기 어려웠다.
생각이란 게 마구잡이로 증식하다가 임계치를 넘기면 자동으로 휙 흩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새로 태어난 생각과 스스럼없이 만날 테다.
아니면 맞춰 놓은 온도에 도달하고 난 후엔 저절로 멈추는 에어컨 같이 작동하면 좋겠다. 그러면 후회와 걱정은 실컷 낮춘 채 현재에 쾌적하게 머무를 테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내 머릿속은 시원찮게 굴러가는 중이다. 모든 게 과부하다. 이미 다녀간 상념과 아직 오지 않은 상념까지 뒤죽박죽이다. 장마철 습기 같은 생각들이 주렁주렁 맺혀 마음이 푹푹 삭아간다.
제습이 필요하다. 글 쓰기 망설여지는 굽굽한 기분을 키보드로 꾹꾹 눌러대 본다.
근래를 되돌아본다. 왜 그렇게 번잡했을까.
배려할 줄 아는 능력-'배려치'를 거의 다 써버려서 그런 게 분명하다. 이미 간당간당하게 남았을 때도 애써 모른 척했다.
'나 아니면 누가 해.', '그래 이번 한 번만 더 넘어가 주자.'
선의의 결심이 후회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요새가 그랬다. 선을 넘는 배려는 크게 세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1. 마음에 탈이 난다.
국어사전에 배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란 뜻이다. 배려는 마음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
사람마다 음식 섭취량이 다른 건 각자가 지닌 힘, 소화력이 달라서이다.
배려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지닌 마음의 힘은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지나친 배려는 과식과 같다. 내 마음의 소화력, 이해력을 무시한 채 타인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러다 보면 서운함과 억울함이 얹혀서 나는 물론 내 주변까지 괴롭게 한다.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티가 나 곁의 사람을 찌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 마음의 소화력을 넘어서는 배려는 적당히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도 관계도 건강하게 돌볼 수 있다.
2. 자유를 뺏긴다.
과도한 헤아림은 스스로에게 감옥이다. 상상 속에 있지도 않은 제3의 감시자, 제4의 감시자까지 만들어 스스로를 감시하고 억압한다. 상상의 감옥 속에서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데 거진 다 비극이다.
'저 사람이 혹시나 이게 필요했던 거 아닐까',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날 나쁘게 보면 어떡하지?' 등등
그런 지나친 염려가 점점 쌓이면 쌓일수록 눈치 볼게 많아진다. 눈치 볼수록 주눅 들고 위축된다. 위축되면 창의력도 쪼그라든다. 사유가 자유롭게 활개 치지 못한 채 고꾸라진다.
꼭 필요한 배려만 하는 습관이 나의 날개를 지킨다.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 이상의 배려는 무거운 족쇄일 뿐이다.
3. 자유를 빼앗는다.
선을 넘는 배려는 타인에게도 감옥이다.
자칫하면 원치 않은 동정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불쾌한 일도 드물 것이다.
과도한 배려는 지나친 상상에서 나오고 지나친 상상은 생각을 왜곡시켜 있는 그대로를 못 보게 한다. 편견의 감옥에서는 나도 타인도 갇혀버린다.
배려는 <配 짝 배, 慮 생각할 려>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편해야 배려이다. 하지 않아도 될 배려까지 해서 괜히 서로 불편하게 만들지 말자.
배려의 경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국 경계선을 넘는 배려는 누구도 유쾌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자유까지 침범하지 못하도록 '거절'이라는 방파제를 잘 세워놓아야 한다. 마음의 한계가 날 선 감정과 태도로 휘몰아치기 전에 말이다.
나 역시도 타인의 마음을 헤치면서까지 배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배려의 경계선을 신경쓰더라도 배려치 자체를 줄이고 싶지는 않다. 배려치는 충분히 키울 수 있고, 키워야만 하는 능력이다. 좋은 배려심은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고 선한 영향력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평소 신체 운동처럼 꾸준히 마음 근육을 단련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배려의 경계선도 점점 더 확장되리라.
적어도 진정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축복을 해줄 수 있는, 공감 정도는 마구잡이로 퍼줄 수 있는 배려 부자는 되고 싶다. 오늘도 배려치를 한 칸씩 늘려본다.
2022.5.26 여수 바다 위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