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ESHOOP 리슙
Jun 10. 2022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종이가 있다.
무언가 그려진다. 색이 퍼져 가고 스며든다.
시간을 두고 차이가 생겨난다.
부피와 질량이 미비하게 달라진다.
표면이 거칠어지고 무게가 증가한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 이상을 변화시키고자 연필을 잡고 붓을 든다.
미세한 점 하나라도 찍히는 순간
종이는 더 이상 예전의 종이가 아니다.
종이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새롭게 태어난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고 미세한 변화일지라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신의 것을 떼어줌으로써
새롭게 발을 내딛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작가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림은 여전히 그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일부가 된다.
그림을 안 그린지는 꽤 됐지만
삶이 그림과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자주 마주친다.
누구나 다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테니 앞으로도 그럴 거다.
'이게 아닌데.'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내 그림인데 내 마음대로 안되는 거 투성이다.
그림 그린다고 종이에 수만 번 선을 그어대고
물기를 먹여봤자 무게는 몇 그램 늘어날까 말까다.
부피도 아주 미세한 차이를 보일뿐이다.
삶도 그렇다.
뭔가 해보려고 기를 쓰고 애는 써보는데
제자리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도망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쫙쫙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몇 그램의 몇만 배에 해당하는 시간들은
종이 위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측정 불가능한
비교 불가능한
고유한 노력과 의미들이
겹겹이 쌓여간다.
수천번, 수만 번 겹쳐지는 붓질이
그림을 완성하듯
우리 삶도 그렇다.
이제껏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내고
앞으로의 나도 만들어낸다.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축적의 결과는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드러난다.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눈에 보이는 변화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너무 힘주고 살지 말자.
입시 준비 하듯이 매 순간에
사활을 걸지 말자.
그러면 나처럼 그림 자체에 이골이 나서
아예 손을 놓아버릴 수 있다.
빠른 속도는 하나의 수단이자
선택지에 불과하다.
속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비교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다 보면
비교는 불가피하다.
삶은 입시도 경쟁도 아니다.
그냥 삶일 뿐이다.
쫓길 필요가 없으니
열심히 밀도를 올리다가도
가끔은 붓을 놓고 멈춰야만 한다.
그리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바라봐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손을 놀리지 않고도
그림이 그려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의 그림이 마음에 안들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림 한 장 한 장이
인생이라는 큰 그림에 있어서는
한 번의 붓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새롭게 덧칠해버리면 된다.
아님 아예 새종이를 가져와서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수많은 과정과 습작이
쌓이고 쌓여 명작을 만들어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다.
그러니 지금의 그림에, 지금의 삶에
충분히 머무르는 건 어떨까.
수년 전 미술학원 알바할 때 그렸던 그림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