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6) - 08/09/2023, 점심 식사까지
4박 5일 후쿠오카 여행 후 바로 이어진 3박 4일 교토 여행. 오늘은 그 교토 여행의 세 번째 날이다.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마치 내가 프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는데 벌써 세 번째 날이라니, 여행자의 삶이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 아침이었다.
이런 나에게 전날 밤부터 이어진 태풍 예보는 은근한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7일 밤부터 시작해 8일까지 오사카 앞바다에 태풍 주의보가 내렸다. Accuweater 사이트에서 태풍이 온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한국처럼 태풍의 강도나 지속 시가나 같은 자세한 정보는 얻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9일까지 태풍이 지속되면 하루 더 있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감도 들었지만 '다행히' 태풍은 별 다른 피해 없이 8일 오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기대도 전혀 근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셋째 날 아침, 커피를 마시러 <기온 엘리트 테라스> 로비로 나갔다. 빈속에 아이스커피 한 입을 흘려 넣고 다시 객실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나는 호텔 정문 틈으로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하루종일 비가 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하루 더 있다 가야 하나'라는 기대감이 교차했지만, 비는 그쳤고 우리 가족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이날은 교토의 상징적인 관광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청수사>에 가기로 한 날이다. <기요미즈데라>라고도 불리는 <청수사>에 가기 위해서는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라는 거리를 지나야 한다. 나는 여행에서 관광지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나라의 '거리'를 탐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 관광지는 엄청난 규모, 역사적 의미, 아름다운 외형 등 분명히 사랑받는 이유가 있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는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에 비해 '거리'는 그 모습과 매력이 다양하다. 한 곳에 멈춰 서있는 관광지와 달리 거리는 골목골목을 지날 때마다 계속해서 다른 모습을 나에게 보여줘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도 준다.
엄마도 나와 취향이 비슷하다. 이미 전날 <철학의 길>에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교토의 거리를 경험한 우리는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를 걸을 생각에 신난 상태였다. 이에 비해 아빠에게 거리는 말 그대로 '길'일뿐이었던 것 같다. 아빠에게 있어 <철학의 길>은 <은각사>로 가기 위한 길이었으며,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는 <청수사>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아빠는 여행 내내 한 마리의 경주마처럼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갔다. 우리 나머지 셋이 길거리를 구경할 때 아빠는 구글맵을 볼 뿐이었다. 가끔 우리가 멈춰 선 곳으로 돌아와 잠시 구경을 하고 다시 길을 찾는 게 아빠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니넨자카>, <산넨자카>에서 제대로 된 구경도 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걷지도 못했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아침부터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니넨자카> 초입까지만 해도 잠시 멈춰서 사진도 찍고 아침 일찍 문을 연 가게도 구경하며 여유로웠지만, <니넨자카> 스타벅스에서부터 사람들이 점점 증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좁고 어두운 <니넨자카>의 스타벅스는 2층에만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보다 훨씬 부지런한 관광객들로 이미 만석이 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스타벅스에서 나와 다시 걷던 우리는 바로 전보다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니넨자카>를 발견했다. 그리고 인파는 점점 불어나면서 <청수사>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는 각각 '이 고개에서 넘어지면 2년/3년 안에 죽거나 재앙이 찾아온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있는 곳이었다. 두 곳 모두 완만한 계단으로 이루어진 언덕이기 때문에 넘어질 일은 거의 없지만, 인파에 떠밀려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 정도면 넘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에 조금 섬뜩해졌다. 다행히 한 명도 넘어지지 않고 우리 가족은 <청수사>에 도착했다.
<니넨자카>에서부터 우리와 동행한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이좋게 <청수사>에 발을 들였다. 이곳의 첫 느낌은 마치 <불국사> 같았다는 것. 푸르른 산과 조화를 이룬 <청수사>의 모습은 당연히 아름다웠지만 수많은 관광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수사>를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사진은 단풍철 <청수사> 본당의 모습이다. 본당 난간에서 바라보는 가을산의 풍경은 정말 장관일 것 같았다. 물론 이에 못지않게 늦여름의 풍경도 멋있었다. 짙푸른 산 한가운데 보이는 작은 목탑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조각배와 같았다.
그러나 풍경 구경도 잠시,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지는 사람들 덕에 우리는 점점 기가 빨리고 있었다. <청수사> 구석구석을 둘러보기보다 멀리서 풍경을 눈에 담는 것에 만족하고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우리 가족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청수사>에서 시내로 나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나가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온 길을 정확히 반대로 '청수사-산넨자카-니넨자카'의 순서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넨자카>까지 간 후에 방향을 틀어 차가 다니는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이다. 이 방법의 경우 전자보다 시간은 훨씬 빠르지만 내려가면서 딱히 구경할 만한 가게나 풍경은 없다.
둘째 날 엄마의 적극적인 호소로 인해 우리는 이날 <니시키시장>에 한 번 더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청수사>에서 <니시키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후자에 해당하는 언덕길로 내려가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의 내비게이션을 자처했던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 길을 선택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인파에 떠밀려 <니넨자카>와 <산넨자카>를 제대로 보지 못 한 것이 아쉬웠는지 <청수사>까지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내려가기를 바랐다.
Q. 이때 자식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3점)
정답은 따로 없겠지만 나와 내 동생은 가만히 있기를 선택했다. 그 결과 아빠의 말에 따라 가장 최단거리로 <청수사>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엄마는 못내 아쉬워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길을 택한 건 잘 한 선택이었다. 아침보다 더 늘어난 인파 탓에 <산넨자카>는 발 디딜 틈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자리가 난 <Kiyomizu Kyoami>라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마저 길을 내려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언덕길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쯤, 뙤약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빠는 거의 달리듯이 횡단보도를 건넜고, 맨 뒤에서 걸어오던 엄마는 결국 길을 건너지 못하는 작은 해프닝이 벌어지기는 했다.
아름다웠지만 인파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는 낭만이 덜했던 <청수사> 구경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어제 탔던 것과 같은 버스를 타고 또 한 번 <니시키시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