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5) - 07/09/2023, 저녁
<니시키시장> 투어를 마치고 기온의 숙소로 잠시 돌아왔다. 점심까지 먹고 시장에서 닭꼬치며 관자꼬치며 이것저것 사 먹었지만 늘 그랬듯이 여행은 항상 배고프기 마련이다. 나에 비해 여행에서 음식을 크게 신경 안 쓰는 엄마 아빠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첫째 날 밤, 둘째 날 방문할 식당을 예약했었다. 구글맵에서 <Hiro Shoten Shijo-Takakura> 라고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야키니쿠 가게였는데, 하필 이날 점심으로 함박스테이크를 먹은 게 문제였다. 엄마, 아빠, 심지어 동생까지 저녁으로 또 고기를 먹기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한 손으로는 내 폰에 파파고를 띄워 놓고, 또 다른 손으로는 동생 폰으로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파파고에 띄워 놓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すみませんが、今日の予約をキャンセルしたいです。(죄송하지만 오늘 예약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전화를 걸기 전 속으로 몇 번 이 문장을 되뇐 후, 긴장되는 마음으로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당일 예약 취소라는 무례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가게 사장님은 끝까지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예약한 시간보다 서너 시간 전에 예약 취소에 성공했다.
이렇게 처음 예약했던 식당을 취소하고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구글맵을 켜 근처 식당을 알아봤다. 처음 찾은 곳은 숙소 근처의 <菊しん>라는 초밥집이었다. 초밥, 우동, 소바 등을 파는 작은 가게라고 하는데 구글맵 리뷰도 괜찮고 음식 사진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결정적으로 교토에서 이태까지 회나 초밥을 못 먹었기 때문에 딱 알맞은 메뉴였다.
이때가 오후 6시 약 30분 전. 오후 6시부터 문을 여는 <菊しん> '오픈런'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숙소 밖으로 향했다. 사람 10명이 앉을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크기의 식당이 많은 교토에서 네 가족이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서두르거나 운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전날 저녁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토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힘든 일이었다. 구글맵에는 운영 중인 시간이라고 나와있었지만 우리 가족을 반기는 것은 'Closed'라고 쓰여있는 A4용지 한 장이었다. Closed 밑에는 일본어 문장이 하나 쓰여있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오늘 영업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신선한 초밥과 우동 한 그릇을 상상하며 들뜬 마음으로 걸어온 우리 가족은 여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녁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 또한 새로운 식당을 찾으러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다음 식당도 문을 닫았거나 예약이 필요하다면 그땐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우린 아쉬운 대로 <Fresco Higashiyama Yasui>라는 마트에서 초밥과 컵라면 등을 사서 오늘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菊しん>이 문을 닫았을 때 '패닉'에 빠진 나와 달리 엄마는 주저 없이 마트로 갈 것을 권했다. 엄마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욕심을 부려 다른 식당에 가는 것은 더 힘들다고 생각한 것 같다. 누구보다도 아쉬웠던 나였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Fresco>로 향한 것은 후쿠오카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후쿠오카 여행 당시 나와 친구는 그날 밤에 먹을 야식거리를 둘러보러 마트에 갔었다. 그런데 대형마트도 아니고 동네에 있는 약간 큰 규모의 마트였음에도 냉장 코너의 초밥들이 전부 신선하고 맛있어 보여 깜짝 놀랐다. 나는 교토의 마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하나로 <Fresco>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해외에서 마트나 백화점에 가보는 것을 좋아한다. 건물 모양이나 제품 배치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또한 익숙한 제품들 중에 내 눈길을 끄는 특이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후쿠오카에서는 손바닥보다 작은 깻잎 세장을 고무줄로 묶어 귀여운 스티커처럼 포장해 놓은 것을 봤는데 개인적으로 참 '일본스러운'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었다.
다행히 나의 예상과 바람대로 교토의 마트 초밥 역시 퀄리티가 좋았다. 특히 호기심에 산 고등어 초밥도 비린맛이 거의 없고 씹는 맛이 좋았다. 우린 초밥 외에도 회, 컵라면, 오니기리 등을 사 와 생각보다 풍족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맛있는 초밥'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나를 제외한 세 가족은 유부우동에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초밥에 우동'이라는 원래 목표를 충실히 실행하고자 가장 유명한 유뷰우동을 골랐는데 국물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유부가 말도 안 되게 달았던 것이다.
어디서 본 컵라면 말고 새로운 컵라면을 찾고 싶었던 나는 주황색 표지가 인상적인 컵라면 하나를 골랐는데, 결과적으로 컵라면에 있어서는 나만 성공했다. 한국에서 찾아보니 '닛신 라오 컵라면'이라는 제품이었는데 면발도 인스턴트 같지 않고 쫄깃했으며 국물도 구수하고 약간 매콤한 것이 정말 라멘이나 탄탄멘을 먹는 느낌이었다.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국물맛을 보여 주고 '너만 그런 걸 골랐느냐'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나처럼 여행에서 음식이 중요한 사람에게 끼니를, 그것도 3박 4일 일정의 저녁 한 끼를 마트 음식으로 먹는다는 것은 분명 1순위 옵션은 아닐 것이다. 만약 나 혼자 간 여행이었다면 초밥집이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근처의 다른 음식점을 알아봤을 것이다. 다만 여행이란 것은 임기응변과 타협의 연속. '식도락주의자'인 나와 '마트 초밥도 괜찮다'는 부모님의 타협은 남부럽지 않은 여행 이틀 째 저녁으로 이어졌다.
가끔은 정말 피하고 싶은 선택일지라도 욕심을 버리고 한 번쯤은 가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맨 뒤로 미루고 싶었던 그 선택지가 의외의 성공을 불러 올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