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4) - 07/09/2023, 점심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
각각의 소제목은 제가 여행 중에 다녀온 장소들의 이름입니다. 소제목에 구글맵 링크를 걸어놓았으니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으신 분들은 클릭해 보세요.
<은각사>에서 버스를 타고 교토 시청에 내린 우리 가족의 첫 번째 목표는 '빵을 사는 것'이었다. 커피가 유명한 교토였기에 자연스럽게 '빵'에 대한 기대 역시 올라갔다. 특히 엄마에게 커피와 빵은 삶의 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생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베이커리들 역시 교토의 여느 가게처럼 장소가 협소한 곳이 많았다. <Grandir Oike> 역시 마찬가지였다. 앉을 곳은 없었고 내 방보다 약간 큰 공간에서 원하는 빵을 골라 나와야 했다. 배낭과 크로스백으로 무장한 우리 가족 네 명이 복작거리며 빵을 고르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아 나와 아빠는 밖에서 나와 기다리기로 했다.
<Grandir Oike>는 가장 유명한 빵집은 아니었지만 교토 빵 맛집 리스트에 종종 이름을 올리는 곳인 듯했다. 교토는 물가에 비해 빵이 싸고 또 맛있었는데, 특히 이곳의 소금빵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아무런 부속 재료 없이 버터와 소금으로만 맛을 낸 소금빵은 그 어떤 커피와도 잘 어울렸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면 소금빵과 겉모습이 비슷한 팥앙금(?) 빵이 있는데, 팥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Grandir Oike>에서의 시간은 교토의 빵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 비해 교토의 커피 및 빵 문화는(물론 내가 가본 곳들 위주로 판단했을 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1) 식사와 커피를 세트처럼 제공하는 곳, 2) 커피만 사갈 수 있는 커피 바, 3) 커피와 빵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여기에 추가하자면 <Grandir Oike>처럼 빵을 살 수만 있는 곳. 물론 서울에도 좁은 공간에서 운영하는 커피 바나 <오월의 종>처럼 빵을 사갈 수만 있는 빵집들도 있지만, 교토는 그 수가 더 많고 보편화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비록 커피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아를 달고 사는 커피 애호가로서 여행지의 커피 및 빵 문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니시키시장>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테라마치>. 이곳 역시 <니시키시장>처럼 지붕이 있는 야외 상업공간이었지만 먹거리보다는 패션, 잡화와 드럭스토어가 주류인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래서 여기가 니시키시장인 거야, 아니면 아직인 거야'만 계속 생각하며 두리번거렸다. 빨리 이곳을 통과해서 <니시키시장>으로 가는 것이 처음 목표였다. 하지만 거리 초입의 헌책방과 잡화점, 그리고 곳곳의 옷가게들과 레코드샵 간판들은 나로 하여금 점차 이 거리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특히 후쿠오카에서도 레코드샵을 찾지 못해 아쉬웠던 터라 시간만 있다면 이곳의 레코드샵을 들러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 중에는 나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없어 나로서는 다시 한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테라마치> 곳곳에 숨어 있던 레코드샵들을 훑어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테라마치>의 끝과 <니시키시장>의 시작 사이에 위치한 함박스테이크 전문점 <Paris 21 Arrondissement>. 'arrondissement'은 찾아보니 프랑스의 군, 구 등의 자치구역 단위 중 하나라고 한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이곳의 주력 메뉴는 함박스테이크다. 그렇다고 음식 맛이 식당 이름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식 작명과 어울리지 않을 뿐 이곳의 함박스테이크는 훌륭했다. 음식 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스테이크와 계란후라이, 야채와 파스타까지 맛은 물론 든든한 한 끼를 채우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점심까지 먹은 후에 겨우 입성할 수 있었던 <니시키시장>. 불과 몇 걸음 차이일 뿐인데 <테라마치>와 <니시키시장>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니시키시장>은 말 그대로 시장처럼 활기찼다. 방문객도 눈에 띄게 더 많았다. <테라마치>보다 많은 수의 방문객들을 사로잡은 것은 시장의 음식이었다. 닭꼬치는 물론 새우, 장어 등의 해산물 튀김 꼬치와 소고기, 조개관자까지 육해공 모든 식재료가 먹음직스럽게 꼬치에 꽂혀 있었다. 또한 우리는 먹지 않았지만 싱싱한 해산물을 가게 안쪽에서 직접 찌거나 구워서 먹을 수 있는 곳들도 있었다. 길을 걸어가며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사 먹고, 근처의 드럭스토어나 기념품 가게, 반찬 가게 등을 구경하는 것의 반복이 <니시키시장>의 메인 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함박스테이크를 배불리 먹고 시장에 온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니시키시장>에는 맛있는 음식이 넘쳐났다. 특히 엄마가 크게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내일 또 올까'라고 할 정도로. (그리고 다음날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니시키시장>은 부모님과 함께 간다면 비추'라는 글을 보고 여행 코스에서 뺄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평소에 사람 많고 오래 걷는 것을 즐기지 않는 우리 부모님도 <니시키시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망설이는 자녀분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가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교토 쇼핑을 계획한 사람이라면 '소우소우'라는 브랜드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검은 바탕에 흰색 숫자가 박혀 있는 것이 이곳의 대표적인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으로 만든 양말과 가방이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인기다. 그래서 그런가 여자친구 선물을 사기 위해 방문한 이 거리에서 여행 중 한국인을 가장 많이 만났다.
교토 <소우소우>는 한 골목에 여러 개의 가게로 이루어져 있다. 각 가게마다 파는 품목이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충분하다면 모두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양말과 가방을 사기 위해 <SOU・SOU着衣(차쿠이)>와 <SOU・SOU足袋(타비)>에 방문했다. 식음료를 들고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는 길에 산 스타벅스 프라페를 동생과 한꺼번에 마시느라고 꽤나 애먹었다. 차가운 에스프레소 프라페를 굵은 빨대로 몇 입이고 삼키자 가슴이 시리고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차가운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SOU・SOU足袋>는 신발과 양말을 파는 매장이었는데, 특이한 디자인의 신발이 많았지만 선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양말만 세 켤레를 샀다. 양말에는 사이즈가 적혀 있었는데, '남성용', '여성용'이 아니라 '250~280mm', '230~250mm' 등으로 적혀 있어 보다 정확하게 사이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발 사이즈와 별개로 길이에 따라 나뉘어 있기도 했는데,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짧은 양말은 그 길이가 애매하게 짧아 이왕 살 거라면 긴 양말을 사는 게 스타일링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니시키시장>을 빠져나오면서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잠시 둘로 갈라졌다. 나와 동생이 <소우소우>에서 쇼핑을 하는 동안 엄마 아빠는 반대쪽으로 걸어가야 나오는 백화점에서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구글맵에서 보기로는 엄마 아빠가 가는 백화점에 <포켓몬센터>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명칭도 '포켓몬센터 OO점'과 같이 나와 있어, 소우소우 쇼핑을 마치고 잠시 포켓몬센터를 구경한 다음 백화점을 돌아보는 것이 처음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만나보니 이게 웬걸. 이름과 달리 이곳엔 백화점은 없고 건물 2층에 <포켓몬센터>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나와 동생이 쇼핑을 하는 동안 엄마 아빠는 근처 서점을 구경하고 카페에 앉아 우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헛걸음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잠시, <포켓몬센터>를 구경하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결국 엄마 아빠가 마저 쉬는 동안 나랑 동생은 가볍게 <포켓몬센터>를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직원의 반가운 인사를 받으며 <포켓몬센터>에 입장한 우리.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귓가에 울리는 그 시절의 BGM은 밤새도록 닌텐도 DS를 붙잡고 포켓몬 세계를 여행하던 때로 나를 되돌려 놨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하며 포켓몬 상품들을 구경하던 나는 엄마에게 선물할 '미뇽' 인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엄마는 포켓몬을 전혀 모른다. 다만 하이킥 광팬인 엄마가 극 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이민용'이기 때문에 '미뇽'이 생각났을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에게 선물할 만한 미뇽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겨우겨우 미뇽 스티커를 하나 찾았지만 엄마가 잘 쓸 것 같지도 않고 가격도 비싼 탓에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우리는 <포켓몬센터>를 세 바퀴 정도 돈 후에 다시 부모님에게 돌아갔다.
기온으로 돌아와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는 길에 숙소 근처의 작은 신사에 들렀다. 사람들은 종을 울리며 무언가 기도하기도 하고 나무판자에 소망을 적어 걸어놓기도 했다. 숙소 근처에 작은 신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이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우연한 방문이었지만 이곳의 한적함은 우연을 주고 사기에는 굉장히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야스이콤피라구 신사>는 악연을 끊길 바라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며 병, 담배, 술 등과의 악연을 끊고 새로운 좋은 인연이 맺어지길 기도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곳으로 다시 돌아가 소원을 빈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야 했을까.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연들이 더 좋은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빌었을 것 같다. 서로 웃고 싸우고 삐지기를 반복하는 우리 가족과 내 친구, 연인들과의 인연도 점점 좋은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가족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여행'보다 '가족'에 포커스가 맞춰진다는 점이었다. 물론 언제 또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 여행, 아무리 가족끼리 왔다고 하더라도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은 가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나에게 있어 레코드샵과 같이 누군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엄마에게 있어 LP는 그저 케케묵은 시대의 음악 듣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엄마도 그 케케묵은 시대의 음악은 좋아하지만. 내 취향을 남은 일행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발견한 레코드샵을 포기하고 가족에 초점을 맞춘 여행을 하자 우연한 기회에 <야스이콤피라구 신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몇 가지 포기했지만,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 '가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려고 했던 것은 잘 한 선택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