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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HOLIDAY Aug 03. 2022

[서평] 어디서 살 것인가?

어디서 살고 싶은가? 아니 어디서 살 것인가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어디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종종 대화한다. 몇 년 전까지 나는 막연하게 한남동에 살고 싶어 했다. 한남동 디뮤지엄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넓고 조용하며 여유로움까지 느껴진 그 동네의 분위기에 빠져버렸다. 디뮤지엄에서 나와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빌라들을 보며 '아, 나도 꼭 성공해서 저런 곳에 살아야겠다'며 다짐하기도 했다. 이렇든 우리는 '어디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동네, 아프트 브랜드, 학군, 집값 등을 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자연이 가깝다거나 자전거 도로가 많다거나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있는 곳을 먼저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몇 년 전 나의 다짐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미래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는 어디에선가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이 꼬이고 또 꼬이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나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다양한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 되었든 간에 살아야만 하는 곳. 저자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도시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 제시한다. 




"창조는 다른 생각들이 만났을 때 스파크처럼 일어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11pg]


 3초 안에 답해보자. 현대 사회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1초,

2초,

3초


 모든 답변들이 나름 정답이 될 수 있겠지만 아마 'SNS'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름부터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소셜 미디어다. 이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것만 같다.' 저자는 SNS가 다양성을 죽인다고 말한다. 설득력 있는 말이다. SNS에서 치열하지만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가끔씩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치열', '건전', '토론' 중에서 대부분의 경우 '치열'에만 치우쳐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SNS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다. 유튜브 알고리즘과 같이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들은 사용자의 콘텐츠 소비 동향을 분석해서 사용자가 좋아할 법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에서 사용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댓글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들의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일이 내부적으로 일어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아파트 단지 별로 주민들이 나뉘는 것처럼'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어떤 주제에 대해 '극단적 성향'을 보유한 몇몇은 인터넷 공간에서 목이 터져라 자기 의견만 피력한다. 양 극단의 사이에 끼인 대다수의 중간층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큰 사람들을 쫓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토론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모이는 곳이기에 얼핏 보면 SNS는 '소통의 장'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 할 말만 찍 써놓고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은 채 으르렁거리거나 그냥 도망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대화가 아니라 배설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SNS는 기존의 체제를 파괴하는 데는 효율적이지만, 사회적 건설에는 비효율적이다."

-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그렇다면 사회적 건설에 필요한 토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를 예시로 들며 이 문제를 공간의 의미와 연결했다.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과 마주해 이야기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2월 즈음부터 시작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채택한 기업이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코로나가 해소된 이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굳이 한 공간에 모이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충분히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택근무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회사원들도 적지는 않다.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립해야 하는 업무에서 화상회의가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팀원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 외에 사무실 근무와 재택근무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화상회의보다 실제로 만나서 회의할 때 우연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하는 대화의 힘이라는 게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바뀌어야 도시가 바뀐다


 '다양성과 존중'에 집중해 이 책을 읽다 보니 몇 년 전 방영한 '알쓸신잡3'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유시민 작가는 리처드 플로리다의 '3T이론'을 인용해 '포용성이 높은 도시가 인재를 모으고 이는 곧 기술 발전으로 이어진다'며, 현대사회에서 포용성을 나타내는 지수 중에 하나로 '게이지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김영하 작가는 현재 게이지수가 가장 높은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맞장구쳤다. 알다시피 샌프란시스코에는 그 유명한 '실리콘밸리'가 있다. 


 물론 리처드 플로리다의 이론이 모든 도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게이지수는 곧 포용력'이라는 주장도 진리는 아니다. 중요한 점은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이라는 사안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토론에 임하고 있는가이다. 네이버에 '알쓸신잡 게이지수'라고 검색하면 위의 대화를 다룬 게시물들이 쭉 나온다. 그중 몇몇 종교인들의 강경한 비판글들이 눈에 띈다. '포용력 운운하며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논조로 수위 높은 글을 쓰면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블로그에 모여들어 맞장구를 친다.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동성애가 불편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까지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편하다면 무엇이 불편하며 과연 우리는 누군가의 선천적/후천적 성적 취향에 대해 불편함을 느껴도 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루지고 있다면 말이다. 퀴어 퍼레이드에 대해 예를 들어보자. 아니 사실 어떤 예시든 상관없다. 퀴어퍼레이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여 서로 응원하며 퀴어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퀴어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끼리 모여 퀴어퍼레이드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이 만난 '중립' 공간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설득보다는 비방이 판을 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과거 러다이트 운동처럼 전 세계의 SNS 기업 본사로 쳐들어가 서버를 폭파시켜야 할까?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도시개발적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건물과 건물, 사람과 건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매력적이고 우연적인 만남을 지속해서 창출하는 것. 아주 멋진 생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만약 하룻밤 사이에 우리의 도시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한다면, 우리의 모습도 달라질까? 우연히 길에서 만나 대화를 튼 사람이 만약 나와 정반대 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비난받기 두려워 대화를 멈추지 않을까? 결국 도시를 바꾸는 것도 사람이기에,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도시도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살 것인가. 어떤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뚜렷한 정답을 내지 못 한 채,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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