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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래빗 Sep 17. 2020

다시 쓰는 <도보 예찬>

나서 자란 곳이 평평한 동네였기 때문일까?


나는 걷는 걸 참 좋아했다.  아마 중학교 때부터였을 거다. 소위 뺑뺑이로 배정받은 학교가 집에서 4km는 떨어진 남의 동네라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우리 학교 앞! 앞! 앞! 학교에서 탄 애들 때문에 정말 버스는 헬이었다. 그냥 같은 방향 친구들과 그렇게 토요일은 집에 걸어가는 날로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물론 우린 그냥 걷는 건 아니었다. 뭐, 서로 국사 문제 내고 불규칙 동사 변형 외우며 갔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재밌네. 우린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얘기들을 나눴고,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용지못 휴게소에서 사발면을 먹고, 시청 앞 광장에 앉아 쉬기도 했다. 하릴없이 새로 생긴 백화점을 구경하다가 오기도 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4km 걸어 집에 오는 데 2시간이 훌쩍 지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


< 구글맵 창원시>


맙소사 고등학교는 더 멀리 떨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뺑뺑이로 마산까지 가버린 것... 다행히 나는 2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 토요일에만 집에 갔다. 그래도 집까지 16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다닌 학교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게 자랑(?)인 산 꼭대기에 있었고, 길도 너무 꼬불꼬불했다.


극강이 스트레스를 받던 고3 시절, 결국 집에 가던 버스 안에서 창원대로 초입이 보이자 벨을 누르고 그냥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집까지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원대로는 창원을 가로지르는 그냥 일직선 대로다. 쭉 걷다 보면 아는 동네가 나오겠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9km가 넘는 거리를 3시간 넘게 걸어서 집까지 왔었다. 그 날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혼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작정 걸었던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 날을 글로 썼다.
그리고 <도보 예찬>이라는 제목으로
 그 해 교지에 실렸다.   




지금도 저녁에 나가 걷기를 곧잘 한다. 사실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길어지자 내 근육들에 대한 예의로 산책이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아파트 커뮤니티도 닫아서, 지인들이랑 같이 운동하려고 좀 먼 동네 헬스장을 등록했더니 도통 갈 마음이 안 생긴다. 그래서 더 걷기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운동복 갈아입고 귀에 무선 이어폰 끼고 그 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기분 내키는 속도감으로 거는 게 썩 마음에 든다.


걷다 보니까 '내가 왜 걷나?'를 자꾸 생각해볼 게 되었다. 대충 4가지 이유가 나에겐 답이었다.


첫째,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다.

지금 하는 일이 글을 읽거나 쓰는 일이라 하루 종일 이 두 작업의 반복이다. 그런데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다. 자기 방을 제대로 찾지 못한 데이터들이 머릿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일단 나간다. Stir.. 머릿속에서 이런 휘저음이 필요하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했던 내 기억 저편의 다른 데이터와 얘들이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종종 한다. 예를 들면 <어려웠더 경제기사가 술술 읽힙니다>의 4주 완독 플래닝도 걷다가 나온 생각이었다.


둘째, 혈색이 좋아진다.

걷는 건 일종의 운동이다. 발바닥을 자극하고 온 몸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켜주니 어찌 혈색이 안 좋을 수 있겠는가. 특히 경락 받을 때 마다 귀동냥으로 들었던 부위들을 쿡쿡 두드리며 걸어서 부기가 잘 빠지는 것 같다. 의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확실히 겨울에 찍은 사진보다 요즘 찍은 얼굴이 좀 더 좋아 보인다. 이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셋째, 고독할 수 있어 좋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 아무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외부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온 날은 더더욱 혼자 걷고 오려고 한다. 특히 강의하고 온 날은 더더욱 평정심을 챙길 필요가 있다. 갑자기 나 좋다는 사람들 속에 있다 오면 우쭐해지기 쉽기 때문에  고독감으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넷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는 보통 3가지 코스로 걷는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코스를 선택한다. 5km 코스는 그냥 운동용으로 속도감 있게 걸어야 한다. 3.5km 코스는 상점들을 통과하며 사람들 사는 걸 보고 싶을 때 고른다. 마지막으로 2km 코스는 그냥 산책용으로 물가를 걷는다.

걸으면서  코스마다 나름의  사람들을 본다. 5km 코스는 3040대 남자들은 다 뛰고, 20대 여자들은 물통 하나 들고 정말 열심히 걷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며 이들의 경로를 방해하는 느긋족들이다.  3.5km 코스는 혼자 걸으면서 상상을 한다. 저 가게는 왜 손님이 없을까, 저 아이는 이 시간까지 왜 집에 안 가고 있을까? 저 사람들은 무슨 할 말이 많아 야외 테이블에서 저렇게 오래 심각한 얘기를 하는 걸까? 등등.. 2km 코스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냥 뒤 따라 조용히 보조를 맞춘다.




10대부터 걷기를 좋아했던 나, 20대에는 퇴근하면서 시장조사한다는 핑계로 광화문에서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 대한극장까지가 내 코스였고.  30대에는 올림픽공원을 도는 게 내가 좋아하는 길이었다.


지금  이렇게
다시 <도보 예찬>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걷기 좋은 계절이 점점 끝나가고 있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칠 수 있으니 나가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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