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몇 가지 생각이 바뀌었다. 기존에 가졌던 사회적 통념이었던 잘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학교 다닐 때는 성적을 잘 받는 것, 직장에서는 빠른 승진과 높은 연봉, 가정에서는 완벽한 아내이자 엄마, 형제자매에게는 사려 깊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딸.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는 엄청난 시간 기근(time famine)에 시달렸고 건강도 나빠져갔다.
시간 기근에 시달리면 스트레스의 증가부터 삶에 대한 만족감의 저하까지 온갖 후유증을 겪기 마련이다. 반면에 시간이 충분하고 심지어 넉넉하다는 느낌은 '시간 풍요(time affluence)'라 할 수 있다.
- 하버드 경영대학원 레슬리 펄로(leslie perlow) 교수-
워킹맘들이 대게 그러하듯 나 역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움직였고, 잠자리에 들며 다음날 시간표를 머릿속으로 다 짜야지 잠들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 기근의 삶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줄 수 있는 장치는 아웃소싱(outsourcing)이었다. 말 그대로 핵심적인 일 외에는 모두 남에게 맡기는 삶이다. 회사 일도 내가 꼭 손을 데어되는 것 외에는 전부 아래 직원이나 외부 업체에 외주를 주었고 집안일도 청소업체에 맡겨졌다. 즉, 쉴 시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였다. 오히려 내가 쥐고 있던 일들을 놓음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모든 일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로컬에서 살아가기를 실천했다. 이전에는 누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할 때는 강남역이나 가로수길을 갔었다. 최소 코엑스나 잠실까지는 나갔어야 했다. 매스컴 어디에 나왔다는 맛집, 분위기가 좋아 인스타에서 핫하다는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쇼핑은 어떠했는가? 더 많은 상품 속에서 무언가를 샀을 때 합리적 판단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결국 그 장소를 다녀왔던 밤에는 지치고 다리가 부어 쓰러져 자기 일쑤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동네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서 모든 걸 해결하고자 했다. 그랬더니 걷기로 충분히 운동이 되었고 다니면서 이웃들과 인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기 시작했다. 불필요함의 범주에는 시간낭비와 물건 , 인간관계를 위한 무의미한 호의까지 포함이다. 가능한 전화와 이메일로 업무를 진행하고 외근을 최대한 줄이는 스케줄로 바꿨다. 그리고 책과 옷 같은 쇼핑은 인터넷으로 구입하고 집 안에 쓰지 않는 물건들은 지속적으로 버려나갔다. 마지막으로는 그냥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소소하게 신경 썼던 관계들을 정리했다. 내 인생의 배 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사람을 차례대로 하선시켜 주는 작업이었다.
'인간이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조용히 머무는 방법을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다(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는 말이 있다. 시간 기근의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몇 가지 행동의 변화를 시작한 이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스텝을 밟은 후 지금 내 삶은 시간 풍요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더 이상 멀티 태스킹을 하지 않아도 되고, 정해진 타임테이블대로 동선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 돈과 권력을 지향하는 삶을 내려놓은 대신 얻게 된 건 소중한 시간이다. 혹 누군가는 이러한 삶을 의지가 약해 패배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승리에 찬 피곤한 저녁을 맞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벤츠를 타는 것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것
유행에 따르는 옷을 입고 화장품을 바르는 것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것
이런 사람이 더 이상 아름답지도 부럽지도 않다. 햇빛이 들어오는 조용한 창가에서 인생의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