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조건

나를 실망시킨 나 자신에게 2

by 홀짝

예전에 함께 일했던 팀원과의 일이다. 나와는 나이 차이도 꽤 났던 그이는 직장 생활 연차와 직급도 나보다 아래였지만 내가 경력직으로 입사할 당시 이미 근속연수 2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성별도 달라서 업무 외 시간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적었지만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쾌활한 그이 덕분에 입사 초반 회사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밝고 쾌활했던 그가 변했다


함께 일한 지 몇 달이 지나면서 평소 그의 표정이 이전보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동료 직원들에게 말과 표정으로 짜증을 내는 것도 간혹 눈에 띄었다. 어쩐지 그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남을 무안하게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이상했다. 그의 짜증에 머쓱해진 타 부서 직원이 나에게 와서 이유를 묻는 일도 있었다.


따로 회의실에 불러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살면서 남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근래 자기 모습에 자신도 깜짝 놀란다고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늘 스트레스는 받아왔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도 안 좋다고 했다. 그가 어떤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그간의 대화를 통해 나 또한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으므로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


직장 생활을 스트레스 없이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월급은 잘 참고 견딘 값이라고도 하니 더럽고 치사하지 않은 월급쟁이는 거의 없지 싶다. 그럼 그는 남들 다 받는 직장 생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버럭 짜증을 내는, 그저 매너 없는 동료였던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도 직접 얘기했지만,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간혹 논란이 되는 ‘악마의 편집’이나 뉴스의 편파, 왜곡 보도는 비슷한 특징이 있다. 전후 맥락을 일부러 빼놓고 보여주고 싶은 특정 부분만을 부각한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 또한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스스로를 보면서 이런 맥락을 놓치기 쉬운데, 여기서의 맥락이란 내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 처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자기 객관화라는 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까기’만 하라고 있는 건 아닐 게다.


환경과 조건을 두루 살펴야 하는 이유


그에게는 첫 직장이었던 이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 하기로 되어 있었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일들이 중구난방으로 주어졌다. 연차는 쌓여가는데, 경력이 쌓였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 하고자 했던 일에서 멀어지자 자신감도 떨어졌다. 직장 생활의 첫 커리어가 이렇게 시작되는 건 개인의 입장에서는 꽤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만약 비슷한 연차와 또래의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회사를 떠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참고 기다렸다. 회사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참을성이 없어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바깥으로 표출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오래 참은 게 문제였다. 같은 문제도 어떻게 맥락을 짚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해석이 따라온다. 만약 스스로 지난 일을 돌이켜보며 반성을 한다고 해도,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좀 더 일찍 회사 측에 문제 해결을 강하게 요청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이지 내가 왜 더 참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 아니다.


몸 어딘가에 염증이 생기면 몸에서는 열이 난다. 그런데 열이 나는 원인이 꼭 염증에 있지만은 않은 데다 염증이 생긴 부위에 따라서도 시급함의 정도가 제각기 다르다. 가벼운 감기는 해열제만 먹어도 금방 지나가지만 다른 곳에 큰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열이 난다고 해열제만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간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실망스러운 결과를 만든 나, 문제를 일으킨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맥락을 살피는 것은 통증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는지 알아야 어디를 치료해야 할지 알 수 있고, 문제의 어디까지가 내 책임이었는지를 살펴야 치료의 범위를 알 수 있다. 치료가 과하면 억울함이 남고, 부위를 헛짚었다면 문제는 반복된다.


그저 모든 게 내 책임이고 내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두루 살피지 않고 잘못된 내 행동만 부각해 자책하는 것은 그래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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