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 후기, 평점의 늪
토요일 오전에는 밀린 집 청소와 설거지를 하겠노라, 마음을 목요일쯤부터 먹었다. 그래서 토요일 오전까지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했다. 막상 토요일 오전에는 방구석에 퍼져 뒹굴거리다 시간을 다 보냈다.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뭐라도 좀 먹고 밀린 집안일을 시작해보려 했는데 이런, 밀린 설거지를 보니 여기에 설거지거리를 더 얹으면 내가 몹쓸 놈이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또 배달앱 찬스를 쓰게 되는구나. 핑계가 좋으니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배달앱을 켰다. 딱히 당기는 음식이 있는 건 아니어서 음식 카테고리 여기저기를 훑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맛집 랭킹으로 이동해서 음식 카테고리별 식당 순위를 살폈다. 그중에서도 배달시킨 횟수가 높은 순서, 리뷰 개수가 많은 순서로 리뷰를 드르륵 읽어 내려갔다. 요즘은 리뷰를 달겠다는 약속만 남겨도 서비스를 주는 곳이 많아서 나조차 몹시 기계적으로 음식 사진을 올리면서 별 다섯 개와 '맛있게 잘 먹었어요'를 올리는지라 별로 참고할 만한 리뷰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리뷰 개수가 많은 집이 다른 집보다는 괜찮겠거니 한다.
이렇게 메뉴와 식당을 고르다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상단에 시간을 보니 앱을 켠 지 거의 30분이 지나있었다. 그 시간이었으면 밀린 설거지를 끝내 놓고 뭐라도 먹고 있을 시간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미식을 하겠다고 여태껏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식당만 고르고 있었나.
가만 생각해보니 어젯밤 자기 전에는 침대에 누워 내년 1월로 예정되어 있는 해외여행 일정에 맞춰 숙소를 알아보려고 호텔 비교 사이트 어플을 한 시간이 넘게 들여다보다 잠들었다. 방문자 평점과 후기 검색은 기본이다. 아무리 위치와 가격, 사진 정보가 맘에 들어도 평점과 후기가 별로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당 여행지의 여행자들을 위한 카페에 가입해서 호텔 이름까지 검색해가며 또 후기를 찾아 헤맸다. 요즘 거의 매일 한 시간씩은 이걸로 시간을 보냈다. 이러다 여행지에서는 구글맵을 켜서 식당 평점을 확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글로벌한 방문객들의 후기를 또 열심히 확인하고 있겠지. 늘 그랬다. 영화 하나를 고를 때도 책 한 권을 고를 때도.
이왕이면 맛있는 거 먹고 싶고, 좋은 데서 자고 싶고, 보고 실망하지 않을 영화나 책을 보고 싶은 맘이야 나무랄 수 있겠냐만 이거야 원 적당해야 말이지. 말로는 실패가 끝이 아니다 나는 지금 직장을 관두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있다 떠들면서 사소한 거 뭐 하나 그냥 해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돈이 아깝다고 시간이 아깝다고 셀프 해명을 해도 소용없다. 평점, 후기, 가격 비교하느라 보낸 시간은 어디서 공짜로 얻어온 것이더냐.
그런데 나 같은 이가 한둘은 아닌가 보다. 음원 사이트는 순위 조작 의혹에 시달린다. '스트리밍 공장'의 존재는 이미 수차례 보도된 바 있다. 출판계에서는 베스트셀러 조작을 위해 책을 사재기한 출판사가 적발된 적도 있다. 배달 어플에서는 평점과 후기를 조작하는 식당도 있단다. 개봉 영화도 그런 '작업'에 대한 썰은 흔하다. 왜 그런 것들을 적발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조작하겠나. 그걸 감수할만한 영향력이 있으니까. 나 같은 이가 한둘이 아니니까. (물론 잘못은 조작한 사람에게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최저가를 발굴하기 위해 내가 들인 시간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내가 참고했던 온갖 후기와 평점, 순위는 정말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먹고 보고 읽고 듣고 하는 만족감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진대, 나는 타인의 주관적 느낌들의 평균값에 기대어 나의 주관이 관여할 기회를 빼앗아왔던 건 아닐까. 혼란하다 혼란해.
앞으로는 뭘 고르고 비교하더라도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겠다고,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씩은 순전히 내 직관에 의존한 선택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뭐, 크게 나아지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좀 남겠지. 하고 싶은 말은 좀 더 생기겠지.
오늘 점심에 배달앱으로 주문한 음식은 대단히 맛이 있지도, 그렇다고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배달앱으로 음식을 주문해먹었던 거의 모든 때와 다름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