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사람이란 고작 그 정도에 자존심을 건다
오랜만에 사고 싶은 게임이 하나 생겼다. 생필품처럼 없으면 안 되는 품목이 아니고서야 대개 사고 싶은 무언가라는 건 꼭 사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사고 싶은 이유를 대자면 열 손가락도 모자란 법이다.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나간 김에 아내에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허락을 구했는데, 결과는 들쑤신 벌집이 되어 돌아왔다. 근래에 내가 사들인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그때마다 아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딴에는 작업을 위해 있으면 정말 편하고 좋은 것들이었지만 아내 생각에는 굳이 없어도 괜찮을 물건이어서 더 그랬나 보다. 나는 작은 것 하나라도 허락을 구하는 게 배려이고 사랑받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적어도 이번만큼은, 아내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도 상대를 위한다면서 정작 내 생각이 너무 많았다.
아직 나는 소유욕에 대한 수양이 한참은 덜 된 모양이다. 한 열흘쯤 지나자 힐끗힐끗 다시 그 게임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많은데, 이쯤 되자 내가 이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과 그저 갖고 싶은 마음 사이에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아내는 장모님과 처음으로 단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그래도 마음속에 어떤 양심 혹은 나중에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는지 6만 8천 원 하는 새 걸 사는 길은 접어두고 중고 거래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중고 판매가는 대략 4만 원에서 4만 5천 원 선이었다. 4만 7천 원 이상에 판매글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거래가 잘 성사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중고 거래는 가급적 직거래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너무 멀지 않은 서울 어느 곳에서 그 게임을 4만 원에 판매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최선이었다.
어젯밤에는 4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사람의 글이 종종 올라왔다. 그런데 거래 지역이 내가 운전을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왕복 두 시간을 다녀오기엔 다녀오는 기름값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파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상대가 알 바 아니므로 그걸 가지고 값을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오늘은 4만 원에 판매하는 사람은 아예 눈에 띄지를 않고 죄다 4만 5천 원이나 그 이상에 파는 사람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제법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번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4만 3천 원에 팔겠다는 사람이 게시한 글이 올라왔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더 기다려보기로 마음먹었다. 3천 원의 갭이 문제였는지 내 자존심의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4만 원이라는 기준점에서 3천 원, 5천 원은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는데 한편으로는 차라리 6만 8천 원을 주고 동네 대형 마트에서 새 걸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고 거래라는 게 그렇다. 사는 사람의 사정과 파는 사람의 사정이 격하게 맞선다. 어떤 사람은 까짓 거 몇 천 원 차이면 쿨하게 흥정을 받아들이지만 애초에 자기가 정해놓은 가격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 거래는 아예 그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팔지 못하면 못했지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사람도 거래하는 상황에 따라 마음에 따라 태도가 왔다 갔다 한다.
'네고 안 합니다'라고 내 거는 사람은 원하지도 않은 흥정의 줄다리기를 사전에 차단하고 싶어 한다. 어느 정도 흥정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도 '네고 가능합니다'라고 내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시작부터 양보의 여지를 보여주는 게 좋을 리 없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관계라는 게 또 그런가 보다 한다. 사람 사이에 갈등과 실랑이가 대부분 고작 3천 원, 5천 원 차이 어디쯤에서 밀고 당기는 게 아닌가 싶다.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면 갈등이라 할 것도 없이 고민조차 필요 없이 그냥 무시해버릴 텐데. 차라리 그 차이가 4만 5천 원짜리 중고와 6만 8천 원짜리 신품 사이의 2만 3천 원 정도였다면 그냥 기분 한 번 내는 샘치고, 상대에게 한 번 기분 좋게 선심 쓰는 샘치고 굽히기도 할 텐데. 그런데 고작 3천 원, 5천 원쯤 하는 실랑이에서는 별안간 자존심까지 걸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모두 달라서 때로는 쿨하게 그 정도 차이쯤이야 상대방에게 한 걸음 다가가 주기도 하고 '이번만큼은 한 발짝도 안 되겠어!' 하면서 끝 간데없이 강경해지기도 한다.
'겨우 그 정도 일로 사이가 틀어진 거야?'라는 말이 공허한 이유가 또한 그렇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 정도'일이다. '그 정도'일이 몇 번 반복되어온 결과다. 겨우 그런 일로 마음 상해하는 나를 보며 자책할 일도 상대에게 서운해할 일도 아니다.
암만 그래도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겨우 이런 일로 그러느냐고? 중고 거래야 당사자와 한 번 사고팔면 끝날 일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관계가 지속되는 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일이다.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겨우 그 정도일이 벌어지는 횟수는 더 많아질 거고, 그래서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일수록 겨우 이런 일로 금이 가는 것이다.
잔돈 아끼는 사람이 부자 된다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우리 엄마는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더랬다. 우리 엄마는 잔돈을 엄청 아끼는 사람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잔돈을 아끼면 정말로 부자가 되는지는 잘 몰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사소한 일, 겨우 그 정도일에도 배려가 있고 사려 깊어야 더 좋은 관계로 더 오래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일요일 오후 중고나라를 기웃거리다 문득.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가져본다.
사족.
아내가 이 글을 읽고 나한테 문자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까짓 거 그냥 새 거 사서 하라고.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