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잃는 것도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절대로 변하지 않은 진리가 단 하나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 또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계속 통할 것 같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놓으면 ‘세상에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가 되겠다. 그런데 공짜로 얻는 것만 없을까. 세상에는 공짜로 ‘잃는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
살아가다 잠시 뒤를 돌아봤을 때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연달아 시험에서 떨어졌다든지, 온 맘 다해 사랑하고 믿었던 연인의 배신을 목격했다든지 하는. 예를 든 일보다 비교적 가벼운 경험도 있을 테고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경험도 있을 게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 시간의 기억은, 심지어 내가 자초한 일이라 더 괴로웠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원치 않는 일을 겪었던 경험을 떠올리고 있다면, 그게 어떤 경험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후회나 아쉬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후회나 아쉬움과는 별개로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경험을 ‘잃는 것’이라 표현해도 좋겠다.
‘내 인생에서 그 시간은 낭비였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차라리 지워졌으면 좋겠어’
이런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아무 의미 없이 손해를 봤다. 잃었다는 것이다.
뜬금없지만 스티브 잡스 이야기
스티브 잡스. 생전의 그가 남긴 졸업식 연설 영상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다.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잡스는 그의 인생에서 겪었던 중요한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일. 자신이 창립한 애플에서 쫓겨난 일. 그리고 췌장암 진단을 받은 일. 특히나 본인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일이나 암 선고를 받아 시한부 인생을 살지도 모르게 된 일 같은 경우는 누가 당하더라도 당장 맨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시간이 지난 현재, 그 일들이 하나 같이 본인 인생의 최고의 사건이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하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실망과 좌절에 빠져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자신이 갈망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은 결과 최고의 사건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뜬금없이 스티브 잡스의 성공담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그의 말이 그저 ‘결과적으로’ 성공한 자의 과거 미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공한 자가 겪었던 고난이야말로 성공을 빛나게 하는 가장 멋들어진 무대 장치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를 대하는, 그것도 꽤나 실망스러운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일, 배신, 실패, 상실과 좌절, 상처와 고통을 겪는 것은 아프고 힘든 일이다. 그런 일을 겪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이 또한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잘 참고 견뎌봐’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지금 당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게 우선이 되어야 할 일이다. 지금, 당장은 그렇다. 그리고 어떤 고통은 그치지 않고 평생을 괴롭힌다.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아픔은 과거로 남은 것이 아니기에 그 또한 지금의 고통이 우선이다.
선택은 내가 한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과거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그 일은 지금 당장 내 인생에서 지워져도 괜찮은가. 나는 그것에서 얻은 것이 단 하나도 없는가. 그것은 나에게 완전하게 무가치하면서 해로운 일이었나. 나는 공짜로 잃은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이든 바라보는 그대로 될 것이라 믿는다. 최소한 그 가능성을 믿는다. 내 잘못이었든, 다른 사람의 잘못이었든 운명의 장난이었든 간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어떤 일도 겪고 난 지금의 나에게 분명 어떤 의미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정말로 지워져야 할 과거가 되는 것이니까. 내 인생의 일부를 공짜로 잃은 것이 되고 마니까. 그걸 나 스스로 결정지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보이지 않는 의미를 애써서 굳이 만들어 낼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없는 샘 지워서도 안될 노릇이다. 지우고 싶다고 지워지지도 않을뿐더러 그래서 더욱 의미도 없이 나를 괴롭힐 테니.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덕분에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뿌듯해 하자는 건 아니다. ‘그래,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지. 꽤나 아픈 일이었지.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그 또한 내가 지나온 시간. 그로 인해 지금 나에게 무엇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겠지.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렇게 믿어.’라고 나 자신이 생각해주길 바란다. 가뜩이나 아픈 기억, 공짜로 잃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누군가를 여전히 원망하게 될 것 같다. 그 원망의 대상이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면 나를 데리고 사는 일이 더욱 괴로워진다.
세상에 공짜로 잃는 것은 없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라는 말도 즐겨 썼다고 한다. 팀 구호로 만들 정도였단다. 나에게 여정 자체가 보상이라는 말은, 세상에 공짜로 잃는 것은 없다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읽힌다. 여정 속 일어날지 모를 수많은 시행착오가 바록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손실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공짜로 잃은 것은 아니며 그 자체에 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리라. 업무적 과업이나 프로젝트에 국한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삶 또한 그 여정 자체에 보상 또한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공짜로 잃는 것은 없다. 공짜로 잃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