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by 홀짝

여섯 살 내지 일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방구석에서 접이식 면도칼을 들고 장난치고 있던 나를 본 건 세 살 터울의 누나였다.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는 어린 동생이 위험하게 칼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 누나가 이를 말리려고 하는 건 당연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다가오는 누나를 보고는 뜬금없이 TV에서 본 드라마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허공에 면도칼을 소극적으로 휘두르며 ‘가까이 오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러다 허공을 긋던 면도칼이 내 왼손 약지 손가락까지 긋고 말았다.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렀던 것과 놀란 누나가 휴지로 내 손가락을 감싼 이후의 기억은 너무 희미해서 잘 나지 않는다. 다만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왼손 약지 손가락에는 그날의 흉터가 남아 있다.


나를 할퀴는 자격지심


내 안의 자격지심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 손가락에 흉터를 새겼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격지심은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마음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혹은 결과에 대해 스스로 미흡하다 생각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을 자격지심이라 한다. 세상에 상처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각자의 자기 방어기제가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역할을 한다.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도 당연히 상처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격지심은 오히려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행동이 되려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허공에 면도칼을 휘두르다 자기 손가락을 벤 꼬맹이 시절의 나처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격지심이 들어차 있을 때의 내면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예민하고 취약하다. 이미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고 기왕이면 사랑과 존중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조차 자격지심 때문에 더욱 어렵다. 자기 약점을 숨기기 위해 과도하게 다른 부분을 부풀리거나 거짓으로 왜곡하거나 반대로 지극히 소극적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자격지심의 결과로 나타난 내 행동은 내가 바라는 방향보다는 원치 않는 방향의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미흡한 결과를 마주하며 다시 스스로를 괴롭힌다.


자격지심은 일종의 필터를 만든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의 전체 모습 가운데 가장 좋지 않은 면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 모습을 가능한 한 가장 안 좋게 해석하는 방식의 필터를 만들어 그 필터로 자신을 본다. 이 필터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내는 온갖 신호, 이를테면 행동과 표정, 말에도 작용하는데 나를 상처 주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타인의 신호가 이 필터를 거치면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꽂혀 상처를 입힌다. 박힌 화살촉은 알고 보면 나의 자격지심으로 ‘곱씹어 생각하며 갈고 온갖 추측으로 다듬으며’ 공들여 날카롭게 만든 것이다.


자격지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회 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정은 가장 안락하고 안전하며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가정의 이미지는 끈끈한 소속감과 유대감으로 바깥세상의 풍파에서 나를 지켜줄 안식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같은 본질적 요소로 인해 가정이 지옥이 된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늘 마주쳐야 하기에 벗어날 수 없고 바깥에 잘 드러나지 않으며 가족과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기도 쉽다. 가장 존중받아야 할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으로 피해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고 그것이 피해자의 말과 행동, 내면에 영향을 끼친다.


자격지심 또한 스스로에게 가하는 내면의 폭력이 아닐까. 나 자신에 대한 가해로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해도 자격지심의 피해자가 된 나는 1분 1초도 나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나 스스로 무너뜨린 자존감을 안고 나는 누구를 만나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하는 평가와 질책은 정당하다고 스스럼없이 믿어버리기 쉽다. 그만큼 거기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그릇된 사랑, 그릇된 자기 방어


이토록 치명적이기 쉬운 자격지심도 시작부터 나를 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폭력이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행되는 것처럼 자격지심 또한 출발은 나를 위함이었을 수 있다.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질책이 자격지심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가진 콤플렉스로부터, 그 콤플렉스로 인하여 받을지 모르는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 자격지심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의 시작이 자격지심의 시작과 비슷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스물여섯 살에 떠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했던 나는 일을 마치고 종종 레스토랑에 있는 바에 앉아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마셨다. 같이 일하는 동료와 함께 할 때도 있었지만 혼자 마시는 날도 적지 않았다. 바텐더 중 제법 경력이 오래된 것으로 기억하는 프랭크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 많은 이였는데, 자주 보는 직장 동료였지만 일하는 공간도 다르고 따로 시간을 함께하는 일도 적어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눈 적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날 또한 여느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방은 홀보다 일이 한 시간 일찍 끝났고, 그래서 나는 밤 열두 시에 혼자 바에 앉았다. 주방 동료는 피곤하다며 먼저 집에 가고 없었다. 그날 마감을 맡은 프랭크에게 독한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고, 첫 잔을 다 마시고 난 뒤 같은 걸 한 잔 더 주문했다. 프랭크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별 일 없이 좋은 하루였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프랭크가 나에게 한 말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너는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여전히 궁금하다. 그는 갑자기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어울릴 때의 나는 대부분 유쾌하고 활발하다. 영어가 짧아서 진지한 이야기를 깊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홀로 있는 나를 가장 오래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프랭크였다. 내가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그도 지켜봤을 것이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어도 그런 내 모습에서 티가 나지 않았나 싶다. 그 말과 그때의 상황과 그 말을 나에게 하는 그의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다.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도 아닌데 워낙 의외의 사람에게 의외의 상황에서 들은 말이라 그런 것인지 그 당시에 유독 그 말이 내 가슴에 박혀서 그런 것인지… 둘 다인 듯하다.


나를 '잘' 사랑하는 연습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나 자격지심에서 벗어나는 명쾌한 방법을 나는 모른다. 안다고 해도 그게 누구에게나 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좀 더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명분으로 이용되는 사랑 말고 그냥 사랑.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이 되라고 다그치는 사랑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좋은 사랑.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 늘 그럴 수는 없어도 계속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 지는 사랑. 때로는 실망하고 원망해도 머지않아 다시 고마운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무엇보다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게 하는 그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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