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공감은 나부터

by 홀짝

첫 연애를 늦게 시작했던 편이다. 스물아홉에 만나 일 년 반 정도를 사귀고 서른 살에 헤어졌다. 아무리 시작이 늦었어도 첫사랑은 첫사랑이다. 헤어지고 나서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 당시 나와 술을 마셨던 친구들이 나 때문에 덩달아 꽤 힘들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 대부분에게는 이미 첫 연애의 아픔이 꽤 오래전 기억일 때였다. 헤어지고 침울해 있는 내게 하는 말도 거의 비슷했다. ‘나도 다 겪었던 일이다’, ‘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금방 잊힌다’, ‘얼른 다른 사람 만나라’ 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많이 힘들겠다"


유독 한 친구의 반응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내가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말을 처음 듣고 난 직후 그 친구의 반응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은 ‘아, 헤어진 거 처음이지? 그걸 잊고 있었네. 많이 힘들겠다’였다. 어찌 보면 별 말 아닌데 그땐 그렇게 그 말이 위로가 됐다. 공감받는 기분이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위로나 용기가 필요할 때, 가장 쓸모 있는 수단은 공감이다. 공감은 말 그대로 상대의 감정을 같이 느끼는 것, 함께 기뻐해 주고 함께 슬퍼해주면 그게 공감이다. 해결책을 찾아 조언하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잘잘못을 가려내 주는 것보다 이렇게 같은 감정을 함께 느껴주는 편이 더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고민에 빠진 사람 열에 아홉은 해답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동의와 격려가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공감은 감정의 동의이자 마음의 격려다.


그럼 우리 자신은 스스로의 감정에 얼마나 잘 공감하며 살고 있을까.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지지해주고 충실하게 받아들였나. 혹시 지독히 공감 능력 떨어지는 주변의 친구가 나를 대하듯 늘 해결책을 먼저 제시해주려 하고 누구나 겪는 일에 그렇게 호들갑 떨 것 없다고 주의를 주고 있지는 않았나. 화냄과 슬픔처럼 부정적으로 여기기 쉬운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때 그것을 서둘러 떨쳐내려 애쓰지 않았던가.


미쳐 다 쏟아내지 못한 감정은 자칫 멍울질 수 있다. 자꾸 애써 감정을 누그러뜨리면 나중에는 내 감정이 내 눈치를 보고 펴 보기도 전에 움츠러들기도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내가 내 감정을 존중하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누가 날 이해해주나. 나를 세상 가장 외로운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 그럴만했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이유 없는 감정 없다. 어느 날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울적하고 기분이 우울해졌다면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유 없는 감정은 없으니까. 과거 언젠가 나 스스로 공감하지 못하고 억지로 외면한 감정이 멍울져있다가 느닷없이 터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과거의 나 자신에게 ‘많이 힘들겠네’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의 감정에 공감해야 한다는 것이 꼭 감정을 분출하고 폭발시키라는 말은 아니다. 일부러 오버할 명분을 던져주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감정을 쏟아내는 자기 만의 방식이 있다.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어도 좋고 가장 익숙한 방식이어도 좋다. 누군가는 확 터트려 푹 빠져있다가 나오는 편을 선호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천천히 조금씩 흘려보내는 걸 익숙해할 수 있다. 자연스레 마를 때까지 언제까지고 푹 젖어 있어 보는 사람도 있다. 방식이야 어떻든 뭐가 문제겠는가. 문제는 꽉 잠가 놓고 외면하는 게 문제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뭔지 아직 모르겠다는 사람은 지금부터 찾아도 늦지 않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공감은 억지로 감정을 막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감정의 근원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 그럴만했다. 충분히.


잊지 말자. 공감은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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