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온 거리는 잊기로 했다: 지나온 거리를 지우는 법
선택에 대한 후회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최근 나는 큰맘 먹고 러닝화를 새로 장만했다. 이미 아디제로 에보슬을 애용 중이었지만, 발가락 통증이 고민이었기에 이번에는 한 치수 큰 사이즈를 골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발가락은 편해졌을지 몰라도 발목이 불편해졌다. 신발 안에서 발이 겉돌며 넉넉해진 공간만큼 발목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발목 부분이 살에 자꾸 쓸리면서 살점까지 까져버려서 통증이 더 불편해졌다.
누군가는 기록을 단축해 줄 거라 믿고 구매한 비싼 카본화가 오히려 본인의 근력에는 과분해 관절에 무리를 주기도 하듯, 신발을 고를 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발끝에 전해지는 불편함 속에 "왜 이걸 골랐을까…" 하는 후회만 가득 차오른다.
그 선택과 후회의 연쇄는 코스 위에서도 이어진다. 풍경이 좋을 거라 예상하고 선택한 길이 막상 달려보니 고르지 않은 흙길이라 눈을 뜨기조차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연속으로 있는 업힐과 병목현상까지 더해져, 가는 길은 너무 답답하고 불편하다. 괜찮을 것 같아 무심코 건너뛴 급수대. 하지만 다음 급수대는 아무리 달려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 그때 마실걸!!! 하!.' '그때 그 간식을 먹었으면 에너지 뿜뿜돼서 기록이 단축됐겠지?' 라는 답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가설을 세운다.
갈증은 심해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른다. 뛰는 게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 시계를 보니 이미 6km나 달려왔는데 아직 4km나 더 남았다는 사실에 맥이 탁 풀린다.. 이때 러너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포기’ 혹은 ‘그대로 달리기’.
더 달릴 수 있는 마법의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달려온 기억을 삭제하는 맨인블랙 주법이다. 번쩍이는 광선으로 기억을 지우듯, 주문을 건다. '뛰는 건 이제 부터 시작! 지금이 진짜 시작임, 딱 5km만 달리면 되는 거야!'
이건 철저히 나의 뇌를 속이는 작업이다. 지나온 숫자를 곱씹으며 고통을 계산하는 대신, 앞으로만 생각하는 것. 조금 유치뽕짝해 보일지 몰라도 이 방법은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 (어릴 적 혹은 지금도... 혼자 내기를 하다가 불리해지면 "방금 건 가짜야! 이제부터가 진짜야!"라고 뻔뻔하게 외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나온 힘들었던 시간들, 평탄하지 않았던 길, 후회로 남은 수많은 순간들을 붙잡고 있어무엇이 달라질까.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때의 그 선택에는 분명 그때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 신발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내가 바라던 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고, 내 발을 덜 아프게 해줄 것 같았으며, 그 코스는 내게 가장 최적의 경로로 보였다. 설령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다 해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그날의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아직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레이스도 내가 최고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미 써버린 체력과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지불한 비용이다. 지나간 결정을 붙잡고 돌아보기보다, 아직 남아 있는 길 위에서 다시 앞서갈 리듬을 찾는 것.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에 호흡 후! 완주는 후회하는 순간들과 모든 찰나가 모여, 결국 지금 내딛는 발걸음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다음 나갈 첫 하프 마라톤에서 나는 마법사가 될 거다. 기억 삭제! 달려!
'맨인블랙 기억 삭제’에도 전제 조건은 있다. 묵묵히 달려온 시간이 데이터로 쌓여 있어야 한다는 것. 체력 또한 자산이기에, 내 몸이 달리는 감각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어야 마법을 수월하게 부릴 수 있다. 해리포터도 마법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렸다 ^^..
인생도 마찬가지다. 진심을 다해 부딪혀본 경험치가 있을 때, 역설적으로 과거를 털어낼 힘을 얻는다. 후회로 밤을 지새우며 울어본 날들, 내 모든 최선을 쏟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던 날들. 그 아픈 기록조차 내 안에 단단한 근육으로 남는다. 일단 해봐야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얻는 법이다.
내 인생 모토와 맨인블랙 달리기 잊기 방법과 닮아있다.
내가 했던 선택들이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왜? 뭔소리야?라고 묻는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니까 결국 앞으로 달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