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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로 Oct 21. 2021

지하철의 세계

옛날 옛날에 고산시라는 곳에 지하철이 새로 깔렸어요.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지하철이 개통되던 날 고산 지하철 공사 사장은 깜짝 선언을 했어요. 다른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하철을 운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거예요. "고산시민 여러분, 오늘 개통하는 고산 지하철은 승객 여러분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드립니다. 승객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좌석 이용권을 구입할 수 있고 그 이용권을 다른 사람에게 자유롭게 팔 수도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용권 가격도 수요 공급 원칙에 따라 변동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수준으로 가격이 얼마든지 오르고 내리게 됩니다. 고산시민 여러분, 이제 이 지하철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개통 후 고산 지하철은 실제로 사장이 예고한 방식대로 운영됐어요. 지하철 내부 공간에는 곳곳에 값이 따로 매겨졌어요. 좌석 중에서도 다른 사람과 닿지 않는 출입문 옆자리가 가장 비쌌어요. 좌석을 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입석표도 생겼죠. 입석표에도 등급이 있었답니다. 좌석과 좌석 사이에 설 수 있는 표와 출입구 쪽에만 설 수 있는 표가 따로 있었죠. 


값이 매겨지다보니 자연스레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생겼어요. 돈이 많은 사람은 한 번에 두세 장, 아니 세네 장씩 승차권을 사서 열차에 탑승했답니다. 그러고는 빈자리에 짐을 놔두거나 아니면 아예 비워두고 넓은 공간을 누렸죠. 반면 돈이 없는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싼 입석표를 구해야 했어요. 


개통 후 시간이 흐르면서 지하철 안에서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한 입석 승객이 좌석 승객을 향해 소리를 높였어요. "이봐요, 아저씨. 당신 혼자 타면서 뭐 하러 그렇게 많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요? 도대체 이게 몇 개야. 10개 좌석을 다 사놓고 그중에 절반은 비워두고 절반은 돈 받고 빌려주고. 이게 공평한 거냐고!" 좌석 승객이 답했어요. "아주머니, 그러게 왜 좌석을 안 샀냐고요. 이 지하철은 자본주의에 기초해서 운영되고 있어요. 누가 좌석 사지 못하게 막았어요? 자기가 돈이 없어서 못 산 걸 왜 나한테 그래요? 나는 엄연히 재산권을 행사하고 있는 거라고요!" 입석 승객이 화를 못 이기겠다는 듯 소리쳤어요. "아니, 당신 눈에는 여기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는 사람들이 안 보여? 저기 애 안고 있는 애 아빠, 지팡이 짚고 있는 어르신, 배 나온 임신부, 몸 성치 않은 휠체어 타신 분들 말이야. 그리고 당신 옆 좌석을 빌려서 가는 사람들 꼴을 봐. 지하철 타는 내내 당신 눈치만 슬슬 살피면서 가는 저 모습이 애처롭지 않냐고. 혹여나 당신이 좌석 대여료를 올릴까봐 걱정에 가득 찬 저 눈빛을 보라고. 이게 사람이 할 도리냐?" 좌석 승객이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어요. "부러우면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돈을 많이 벌어서 좌석 부자가 돼서 자릿세를 받으란 말이야. 누가 하지 말랬어?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야. 무슨 빨갱이도 아니고 말이야. 싫으면 구질구질한 윗동네 빨갱이 지하철 타든가!" 주위에 있던 입석 승객들이 말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 몸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답니다. 입석 승객들은 매정한 좌석 승객을 내내 노려봤지만 좌석 승객은 콧방귀를 뀌며 이어폰으로 노래만 들었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고산 지하철 사장이 바뀌었어요. 신임 사장은 취임식에서 그간의 지하철 운영 방식을 바꾸겠다고 선언했어요. "시민 여러분, 그간 고산 지하철은 타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철은 본디 타고 이동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 좌석을 사고파는 시장이 돼 버렸습니다. 이 와중에 대다수의 승객은 서서 가고 돈 많은 소수만이 좌석을 싹쓸이하는 문제점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다좌석자에게 세금을 매겨 잉여 좌석을 팔게 만드는 한편 다좌석자가 좌석 임대료를 지나치게 높이지 못하도록 한도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열차 내부에 노약자석과 임산부 배려석을 만들어서 사회적 약자들이 앉을 수 있게 보장하겠습니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돈 많은 좌석 승객들이 즉각 반발했어요. 그간 자리 장사로 쏠쏠하게 돈을 끌어 모았는데 이제 그렇게 영업을 하려면 만만찮은 세금을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좌석 임대료를 올리는 장난도 앞으로는 치지 못하게 됐으니 돈 많은 좌석 승객들로서는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죠. 부자들은 새로운 정책을 펴는 사장을 교체시키기로 마음먹었어요. 자기들끼리 좌석을 맞바꾸면서 더 높은 가격으로 거래를 성사시켰죠. 그러니 갈수록 좌석 승차권 가격이 올라갔어요. 그러면서 부자들은 사장 때문에 좌석 승차권 가격이 올라가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어요. 열차 기관사가 새로운 정책을 소개하는 차내 방송을 할 때마다 일부러 '손바꿈'을 하면서 좌석 승차권 가격을 끌어올렸어요. 그러자 지하철 안에서는 사장과 기관사가 새 정책을 소개할 때마다 좌석 승차권 값이 오른다면서 불만이 고조됐어요. 


특히 입석 승객들 중 돈이 적당히 있는 중산층 사람들이 가장 크게 불평했어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자기들도 좌석을 사들여서 부자들처럼 돈놀이를 할 수 있었는데 좌석 승차권 가격이 뛰어버리니 심통이 난 것이에요. "내 사유재산인데 왜 자릿세도 마음대로 못 받냐!" "피땀 흘려 자리 샀더니 왜 뺏냐!" "지하철 공사가 사유재산을 강탈하고 있다!" "남들이 서서 가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냐!" "사장과 기관사 너희들도 지하철 좌석 여러 개 갖고 있잖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석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등 구호가 쏟아졌어요. 이를 지켜보던 부자 좌석 승객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어요. '그래그래. 잘하고 있어. 나중에 저 사장이 쫓겨나면 내가 너희들한테는 좌석 한두 개 쯤은 나눠줄게.' 


부자 좌석 승객들이 비웃는 모습이 입석 승객들의 눈에 포착됐어요. 입석 승객들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좌석 승객들을 노려봤어요. 입석에서 엄마 손을 잡고 있던 한 아이가 무릎을 어루만지며 물었어요. "엄마, 왜 우리는 이렇게 끝까지 서서 가고 저 사람들은 앉아서 편하게 가?" 엄마는 눈물을 글썽였어요. "아가, 그건 엄마 아빠가 돈이 없어서란다. 저 자리는 저 사람들이 돈 주고 산 것이거든." 부자 좌석 승객들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유재산을 비로소 인정받은 기분이었으니까요. 아이가 다시 물었어요. "엄마, 이 지하철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거 아니야? 왜 저 사람들은 우리가 낸 돈으로 만든 지하철에 있는 좌석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 입석 승객들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아이는 심통이 나서 말을 이어갔어요. "어린이집에 가면 꼭 저런 애들이 있어. 공용 장난감인데 그거 자기만 갖고 놀겠다고 하면서 친구들 괴롭히고 선생님 말씀 안 듣는 애들 말이야." 엄마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어요. "엄마, 그런 애들은 어떻게 하는 줄 알아? 요즘은 선생님이 혼내고 그런 시대는 아니거든. 그러니 그 말썽쟁이가 장난감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 다들 행동을 멈추고 장난감을 스스로 내놓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거지. 그러면 말썽쟁이는 미안해서인지 결국은 못 참고 내놓더라고."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입석 승객들은 잠시 후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어요. 그리고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어요. 입석 승객들이 지하철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한 부자 좌석 승객은 목적지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어요. 입석 승객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탓에 좌석에 갇힌 처지가 돼버렸어요. 부자 좌석 승객이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입석 승객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결국 부자 좌석 승객은 꾀를 냈어요. 입석 승객들을 한 명씩 자기 좌석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출입문으로 갈 공간을 만든 거예요. 결국 부자 좌석 승객은 10개 좌석 승차권을 공짜로 내주고 빈털터리가 돼서야 비로소 다음 역에서 하차할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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