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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로 Oct 21. 2021

권력지향 對 권력지양

유럽여행

바티칸은 예술이다. 정말 예술이다. 바티칸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를 이끄는 로마교황청이 위치한 곳이자 로마 가톨릭 문화의 본산이긴 하지만 사실 바티칸의 정수는 교회건축과 미술품이다. 교황과 추기경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비롯해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등에는 웬만한 이는 다 한번쯤을 들어봤을 유명한 예술작품이 즐비하다. 회화작품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히에로니무스,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학당과 그리스도의 변용,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 실물이 이곳에 전시돼있다. 조각작품은 또 어떤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포함해 라오콘 군상, 벨베데레의 토르소 등 명성이 자자한 명작들이 이곳에 소장돼있다. 건축 역시 대단하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산 피에트로 광장은 물론 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 성 베드로의 성좌와 발다키노가 위용을 자랑한다.


바티칸을 돌아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중 문득 이 작품들이 어떻게 이곳에 모여있는지 궁금해졌다. 한국 재벌들이 고가 미술품을 사들여 미술관을 만들고 돈세탁에 활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교황도 그랬던 건가? 알고 보니 당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은 몰래 돈세탁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서유럽 전역을 호령하던 교황에게는 견제세력 따윈 없었다. 부정한 행위를 해도 교황과 성직자는 불가침의 존재였다. 심지어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때도 교황과 성직자들의 위세는 여전했다. 교황은 마틴 루터가 그렇게 비판했던 면죄부를 팔아 각종 건축물을 신축 내지 증축했다. 교황이 각종 명목으로 신자들과 각 지역 영주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은 고가 예술작품 매입에 쓰였다. 결국 오늘날 추앙 받는 르네상스 예술은 교황의 부정축재와 부패행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를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계는 달랐다. 후원자가 부패해도 그 후원에 의해 제작된 예술품은 인정을 받는다. 요컨대 필자가 찬탄을 금치 못했던 바티칸의 건축물과 예술품은 사실상 부패한 권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바티칸에 작품을 남기고 오랜 명성을 누리는 예술가들의 행보다. 이들은 과연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작품 중 오른쪽 아래 부분에 당시 가장 부패했던 추기경을 그려넣었다. 이를 근거로 후세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고 해석한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황과 교회로부터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이는 미켈란젤로다. 그는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수년에 걸쳐 그릴 수 있는 특혜를 받았으며 그의 피에타 조각은 로마 가톨릭의 본산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안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간택돼 중용됐던 차은택 등 일부 예술가들의 행보와 미켈란젤로의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교황을 비롯한 당시 최고 권력자들을 후원자로 두고 작품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인류역사가 이어지는 한 영원히 이어질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독이 든 나무에서 난 독이 든 열매가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무심코 먹었다간 자칫 부패권력을 지지하고 부역하는 길로 부지불식간에 접어들 수 있다. 물론 이 거장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할 것이다. 후원자의 부패 여부를 떠나 길지 않은 인생에서 자신이 역량을 발휘해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다는 항변도 일리는 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처럼 살아있는 동안 누구의 후원을 받았느냐보다 어떤 작품을 후세에 남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권력에 저항하는 쪽을 택한 예술가들도 있다. 바티칸의 이웃나라인 스페인으로 가면 다른 길을 택한 예술가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미술의 거장이자 입체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피카소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군부에 저항했다. 프랑코 진영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해 수천명을 학살하자 피카소는 이를 비판하는 회화 '게르니카'를 그렸다. 이후 프랑코의 눈 밖에 난 피카소는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조국 스페인 땅을 밟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는 또 한명의 저항예술가가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 중 한명으로 꼽히는 파블로 카잘스는 스페인내전에서 프랑코가 승리하자 프랑스로 떠나 이후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권력에 맞서지 않고 스페인에 머물렀다면 고향에서 평생 순조롭게 작품활동을 하며 안정된 삶을 살았겠지만 카잘스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르네상스 거장들과 두 파블로의 삶을 대조하다보니 이런 일이 비단 예술가들의 고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권력에 충성하고 어떤 세력을 비호해야 하는지, 어떤 권력을 배척하고 어떤 세력을 멀리해야하는지. 그리고 그 권력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인간인 탓에 모두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누군가의 후원과 지지를 받으며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을 후원자, 친구, 동지, 동료, 선배, 후배, 동기로 부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누군가가 동시대 또는 역사를 통틀어 옳고 정의로운 인물인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세력인지, 부패를 일삼는 사람인지 실상 잘 알지 못한다. 드루킹이라는 여론조작 전문가로 인해 궁지에 몰린 현 문재인정부와 고 노회찬 국회의원 역시 드루킹의 실체를 애초에 알았다면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정부에 가담했다 영어의 몸이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비호세력의 실체를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 있다. 


바티칸과 바르셀로나를 다니며 더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내가 종사하는 나라와 조직, 업계는 과연 정의로운 권력인가? 나는 그 권력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지금의 내 태도와 행보는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나는 어떤 권력을 가까이 하고 어떤 권력을 멀리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삶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는 권력에 가까우면서도 권력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우디는 구엘 공원, 까사 밀라, 까사 바티요 등 건물을 만들면서 에우세비오 구엘 등 당대 최고 부자와 신뢰관계를 쌓았다. 이 때문에 가우디는 피카소 등 동시대 예술가들로부터 권력에 부역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그러면서도 가우디는 권력과 거리를 뒀다. 가우디는 동시대 건축양식을 거부하면서 곡선미가 넘치는 건축물을 지으며 소수세력을 자처했다. 동시대 건축가들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아도 그는 굳이 인정을 받으려 몸부림치지 않았다. 가우디는 건축작업장 근처에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시설을 가장 먼저 지을 정도로 노동인권에 주목한 인물이기도 했다. 가우디는 또 필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여론권력과 가깝게 지내지 않은 탓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노숙인 취급을 당해 숨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가우디의 삶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권력과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가우디가 마무리하지 못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공사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26년에 마무리된다. 위대한 건축물의 완공과 함께 가우디가 건축계의 새로운 권력이 될 그 해가 되면 그 해답의 일부나마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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