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수 Feb 11. 2021

냉동고에서 꺼낸 딱딱한 글

때로는 마카롱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냉동고에서 꺼낸 식빵 같다. 딱딱하다. 바로 먹을 수도 없고, 5~10분 정도 빵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세상에 폭신폭신한 빵이 얼마나 많은가? 갓 구운 식빵,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카롱, 촉촉한 크루아상까지…. 이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빵이 많고 많은 데 내 빵은 아니 내 '글'은 말랑말랑함과는 거리가 멀다. 특정한 소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유머까지 없으니. 냉동고에서 갓 꺼낸 식빵처럼 딱딱하다. 


누구는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쓴 장문의 글을 금방금방 SNS에 잘도 올리는 데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아 docx 파일을 연다. 바로 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일단 쓰고, 읽은 다음 글을 올릴 사이트로 이동한다. 왜 이렇게 글 쓰는 과정이 심플하지 않을까? 


잡지사 기자 시절 원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긴 했다. 글 쓰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기자 한 명을 불러내 혼쭐을 내는 편집장이었다. 딱히 누구를 정해 놓진 않고, 편집장은 돌아가면서 한 명씩 기자를 불렀다. 오늘은 A, 그다음 날은 B, 그 다음다음날은 C. 드디어 편집장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아무 말없이 일어나 편집장 책상 앞에 섰다. 그는 나를 세워놓고 원고에 대한 평을 쏟아 냈다. 편집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 들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고개만 숙인 체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왜 편집장한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지. 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는지. 나이도 어렸지만 일명 데스크라고 불리던 편집장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던 같다. 편집실의 분위기는 물론 글의 톤까지도 편집장에 따라 좌지우지됐다. 그래서 데스크가 바뀔 때마다 편집실 분위기는 물론 그가 데리고 온 기자들까지 우르르 그만두고 또 우르르 들어오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매달 글을 쓰고 마감을 하다 보니 글쓰기 자체가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데스크한테 원고를 보내고 나면 늘 가슴이 답답했다. 내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검열을 받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편집장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누군가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원고를 붙들고 늘어졌다. 딱히 고칠 부분이 생각나지 않아도 읽고 또 읽었다. 원고 마감 시간이 올 때까지 뜸을 들이고 미적미적거리다 마감 직전이 되어서야 원고를 보냈다. 원고를 끝낸 후 성취감이나 후련함이 들기도 전에 기자를 닦달하는 편집장.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까칠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도 있지 않은가? 이후 몇 번 더 편집장이 바뀌었지만 잡지사 시절의 글쓰기 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제 하늘 같던 편집장도 사라지고 편집실의 꼬맹이 기자도 아니지만 글쓰기가 주는 압박이나 강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평론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쓰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몸과 마음에 힘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글을 쓸 때가 여전히 좋긴 하다.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 놓고 들여다본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이 시간 동안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가끔 자판의 속도가 빨라질 때면 신바람이 난다. 그렇게 쓴 글은 다시 봐도 고칠 곳도 별로 없고, 한 번에 읽힌다. 냉동실에서 막 꺼낸 식빵처럼 딱딱하지만 뭐 그런대로 괜찮다. 때로는 크루아상이 되고 싶고, 때로는 마카롱이 부러울 때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곁에는 냉동고에서 갓 나온 딱딱한 식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아이러니는 그는 냉동고에서 꺼낸 차갑고 딱딱한 식빵만 좋아한다. 내가 가끔 글을 쓰는 것도 모르고. 







내일이 설날이네요. 가족의 수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은 있고, 음식 몇 가지를 만드니 하루 해가 저물었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 얼른 컴퓨터를 켰습니다. 급하게 할 작업은 없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나만의 시간 확보, 연휴에는 더욱 소중한 시간이죠. 


컴퓨터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 글에 대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이미지를 연상해 보니 퍼뜩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냉동고에 넣어둔 식빵. 그 생각을 따라 자판을 두들기고 냉동고에서 식빵을 꺼내 사진을 찍고, 이렇게 한 해의 저녁을 보냅니다. 


모두들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소중한 저녁 보내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시속 3km로 제주를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