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SNS 방랑기
2001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친구들은 도토리를 사고 일촌을 맺으며 싸이월드 미니홈피 꾸미기에 열을 올렸다.
서울에 상경해서 생활이라기보다 생존해야 했던 나는 분위기 있는 카페와 맛집, 데이트 따위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친구들이 싸이월드에 올린 맛집 사진과 데이트 사진을 보며 묘한 소외감을 느끼며 왜 자신의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했다. 일종의 보여주기와 과시로 치부해버리고 파도를 타며 눈팅만 할 뿐 싸이월드에 둥지를 틀지는 않았다. 도리어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며 다음 카페로 갔다. 다음 카페는 이미 동호회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나는 내 이름의 카페를 만들어서 소소하게 글을 올리고 자료를 올려놓으며 팬도 없는 팬카페의 모습으로 활용했다.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에게만 정회원 자격을 주었으니 하루 방문자라고 해봐야 두세 명이 전부인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방송작가 일을 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영원할 것 같았던 싸이월드의 집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스마트 폰으로 접근이 용이한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서로를 팔로우하며 사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그때 당시 나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모두 방송가의 사람들인지라 사생활 노출이 꺼려졌고, 사회. 정치 문제에 목소리를 낼만큼 뚜렷한 색깔도 없었을뿐더러 방송글을 쓰느라 바빠 SNS에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내가 읽고 좋아요만 눌려도 활동이 리트윗 되는 시스템 때문에 좋아요조차 누르지 않고 최근 사람들이 관심사와 이슈가 뭔지 지켜보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가 2011년, 10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마치 연어처럼 고향인 경상도로 내려와 아이를 낳았다. 쉴 새 없이 폰카로 아이의 성장 모습을 담았고 수많은 사진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중 카카톡과 연동된 카카오스토리에 발을 들였다. 조리원 동기들과 대학 친구들을 중심으로 친구를 맺고 육아일기를 가장한 내 새끼 자랑질을 하며 왕성하게 SNS 활동을 했다. 둘째가 태어날 때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카카오스토리도 시들해졌다. 아이들의 사진이 올라오던 카스는 광고로 도배됐고 쇼핑을 하거나 가끔 친구들의 생일을 알려주는 알람 기능을 하고 있다.
육아의 피크타임을 끝낸 2017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육아책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기획안을 쓰고 소소하게 글을 썼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고 피드백이 없으니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그때 마침 블로그에 쓴 글들이 모아 출간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7년 뒤늦게 블로그 막차에 올라탔다. 낯선 사람과 이웃을 맺고 포털에서 검색을 해서 나의 글을 읽고 가는 사람들이 생기자 소소한 재미가 생겼다. 포털에 검색이 될 수 있도록 해시태그를 붙이고 상위 노출을 위해 단어를 반복하고 수많은 이미지를 올려가며 글을 썼다. 날마다 방문자 수를 확인하고 방문자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날에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다시 방송 일을 시작하며 블로그와 뜸해졌다. 돈벌이 글을 쓰다 보니 블로그 글을 쓸 에너지와 의미가 줄어든 것이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방송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유튜브의 막강한 파워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돈 버는 일반인 크리에이터들을 만나면서 유튜브 시장의 무한 가능성을 보고 노후대책도 세울 겸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하지만 동영상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마땅한 콘텐츠가 없어서 크리에이터이고 싶은 구독자로 살고 있고, 카스를 떠났던 친구들이 헤쳐 모여있는 인스타에서도짬짬이 놀고 있다.
그리고 두 주 전,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됐다. 12개의 글을 썼을 뿐인데 다음에 두 번 노출이 되어서 구독자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3만 뷰를 찍었다. 신세계다. 무엇보다 이미지보다 글에 집중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 나와 잘맞다. 여기서는 꾸준히 오래오래 즐기며 놀고 싶다.
가끔 이런 고민을 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에게 SNS 계정과 비번을 잊지 말고 남겨야 할 텐데...
아이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