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도 안 했는데 취한 얼굴

내 몸에 몰래 술을 빚는 병이 있다

by 전의혁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내가 취한 사람처럼 보인 적이 있다.


걸음이 비틀거리고, 말이 풀리고, 머리가 멍해진다.
그런데 냉장고에도, 싱크대에도, 내 입에도 술은 없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설명’을 준비하게 된다.


그건 방종이 아니라, 억울함에 가까웠다.
나도 그랬고, 특히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눈빛을 마주할 때 더 심했다.
혹시 당신도 “정말 안 마셨어요”라는 문장을, 필요 이상으로 반복한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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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실제로 ‘질환’ 일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알코올 중독이 나타나는 희귀 장 질환, 자가 양조 증후군(auto-brewery syndrome) 이야기다.
연구진은 이 증후군이 몸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규명한 것으로 보이며, 결과를 ‘네이처 미생물학(Nature Microbiology)’에 보고했다.


내가 술을 마신 게 아니라, 내 장이 술을 만들었다.


연구진에 따르면 자가 양조 증후군은 장내 세균이 탄수화물을 에탄올로 전환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탄수화물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소량의 알코올이 만들어지지만, 이 증후군에서는 그 수준이 ‘취기’를 유발할 만큼 높아진다.
희귀하긴 하지만, 연구진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드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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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희귀해서가 아니라, 알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보고된 사례가 100건 미만이라고 전하면서도, 인지도가 낮아 환자와 의사가 이를 알아보고 진단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술 마셨죠?”라는 질문이 먼저 오고, “아니요”라는 대답은 늘 의심부터 산다.


이번 연구는 비교적 큰 규모로 접근했다.
연구진은 자가 양조 증후군 환자 22명을, 질환이 없는 동거 파트너 21명, 또 다른 건강한 사람 22명과 비교했다.
논문에서 연구진은 “현재까지 자가 양조 증후군 환자를 대상으로 한 가장 큰 코호트 연구”라고 밝혔다.


증상이 악화된 시기에 채취한 대변 샘플은 실험실에서, 파트너나 건강한 사람의 샘플보다 유의하게 더 많은 에탄올을 생성했다.
연구진은 이 결과가 대변 기반 검사가 진단에 활용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했다.
‘취한 것 같다’는 느낌이, 검사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뜻이다.


원인으로 지목된 건 ‘낯선 세균’이 아니었다.
대변 분석에서 여러 특정 세균 종이 핵심 유발 요인으로 나타났고, 여기에는 대장균(E. coli)과 폐렴간균(Klebsiella)처럼 흔한 질병 원인균도 포함됐다.
익숙한 이름이어서 더 섬뜩하다. 내 안의 일상적인 균이, 어떤 날엔 술을 빚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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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힌트도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연구진은 한 환자에서 대변 이식 이후 증상이 완화된 사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스턴 종합병원의 감염내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호만은 “자가 양조 증후군은 오해를 많이 받는 질환이며, 검사와 치료법이 거의 없다. 우리 연구는 대변 이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세균과 미생물 경로를 규명한 것이 더 쉬운 진단, 더 나은 치료,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길을 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에는 항생제를 여러 차례 복용한 뒤 증후군이 발생한 한 남성의 증례도 포함됐다.
그 남성은 건강한 기증자의 장내 세균을 담은 캡슐을 복용하는 방식으로 대변 이식을 받았고, 이후 증상이 3개월 동안 사라졌다.
두 번째 대변 이식 이후에는 16개월 이상 증상이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여기서 마음이 조금 풀리는 사람도 있을 거다.
적어도 “그건 네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설명 가능한 기전이 있다”는 말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연구진은 결론에서, 아직 합의된 치료법이나 표준 치료는 없다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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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취기 자체보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들이다.
연구진은 진단 지연으로 환자들이 고통받는 경우가 많고,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되며, 가족·사회·법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한 번 취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설명은 길어지고 관계는 짧아진다.


오늘은 작은 선택 하나만 남기고 싶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한 느낌’이 반복된다면, 그 경험을 혼자서만 도덕의 문제로 끌고 가지 말자.
검사나 치료를 임의로 바꾸기보다는, 의료진이나 약사와 상의해 가능한 원인을 함께 좁혀가는 편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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