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배가 더 무서울 때

체중계 숫자보다 허리띠 구멍이 심장을 더 잘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연구

by 전의혁

연말 모임 시즌이 되면 약속이 겹친 날이 많아진다.
1차에서는 삼겹살, 2차에서는 치킨에 맥주 한 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다 보면 배가 나왔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대충 “연말인데 뭐” 하고 넘기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검진센터에서 허리둘레 재던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체중보다 허리둘레가 더 중요해요.”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던 어느 저녁,
‘맥주 배(beer belly)가 일반 비만과는 다른 방식으로 심장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학회 발표 기사를 읽게 됐다.


독일 함부르크 시티 헬스 코호트에 참여한
45~74세 성인 2,173명.
평균 나이는 64세, 그중 43%는 여성.
이미 심장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미리 걸러 낸 뒤,
3.0 테슬라 심혈관 MRI로 심장 구조와 기능을 들여다봤다.


연구진은 두 가지를 동시에 계산했다.
하나는 우리가 익숙한 BMI(체질량지수),
다른 하나는 허리-엉덩이 둘레 비율,
그러니까 얼마나 ‘배로 살이 몰려 있는지’를 보는 지표였다.


이 비율의 중앙값은 0.94.
여성은 0.85 이상, 남성은 0.90 이상을 비만으로 봤을 때
참가자의 80%가 이 기준을 넘었다.


그런데 같은 사람들을 BMI 기준으로 보면
비만(BMI 30 이상)은 20%뿐이었다.
체중계만 보면 “조금 과체중” 정도였던 사람들이
허리-엉덩이 비율로는 이미 대부분 비만으로 잡힌 셈이다.


재미있는 건, 심장이 두 지표에 아주 다르게 반응했다는 점이다.


허리-엉덩이 비율이 0.1 올라갈 때마다
좌심실 이완기말 질량은 3.9g 늘어났지만
이완기말 용적은 4.4mL 줄었다.


우심실도 비슷했다.
이완기말 용적이 5.7mL 줄고,
결국 한 번 뿜어내는 혈액량,
즉 박출량은 좌심실에서 2.2mL, 우심실에서 2.1mL 줄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배 안쪽에 내장 지방이 많을수록
심장은 두꺼워지고, 안은 비좁아진다.
동심성 리모델링,
겉으로는 튼튼해 보이지만 속은 꽉 막히는 방향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이 연관성은 특히 남성에서 더 강했다.
같은 허리-엉덩이 비율 변화에
우심실 용적과 박출량 감소가 남자에게서 더 뚜렷했다.


반대로 BMI는 어땠을까.


BMI가 1포인트 늘어날 때마다
좌심실 이완기말 질량은 2.3g,
이완기말 용적은 0.5mL 늘었고,
박출량도 0.4mL 정도 증가했다.


그러니까 체중 증가,
그러니까 ‘일반 비만’은
심장 자체를 더 크고 넓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다.
혈액량이 늘고 심장이 그걸 감당하기 위해
방을 키우는 방향의 리모델링인 셈이다.


우심실은 BMI와 뚜렷한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여성에서는
BMI 1포인트 증가에 따른 좌심실 질량 증폭이
남성보다 0.9g 정도 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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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엡펜도르프 대학의료센터의 연구자 제니퍼 얼리는
“BMI가 올라갈수록 심장이 ‘커지는’ 쪽으로,
내장 비만이 심해질수록 동심성 리모델링이 나타나는 쪽으로
각기 다른 패턴을 보였다”고 요약했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베를린 샤리테 심장센터의 세바스티안 켈레는
이 데이터를 두 가지 메시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BMI와 허리-엉덩이 비율은 심장에 서로 다른 상처를 남긴다”는 것.
일반 비만은 혈액량과 부하를 늘려
심장 방을 확장시키지만,
내장 지방은 대사·염증 스트레스를 통해
확장 없이 비대를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성별이 중요하다”는 것.
같은 내장 비만이라도 남성에서 연관성이 더 강했던 이유는
호르몬, 대사, 지방 분포가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같은 기준을 남녀 모두에게 적용하면
심장 위험을 과대 혹은 과소 평가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병원 의사들만 알아야 할 내용 같지만,
사실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람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숫자 하나로 자신을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나 BMI 25 안 넘었으니까 괜찮아.”
“체중은 작년이랑 비슷한데?”


하지만 허리와 엉덩이 둘레를 재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허리띠 구멍이 두 칸 늘어났는데도
체중은 별로 안 변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연구자들은 말한다.
심장 위험을 평가할 때
BMI에만 기대면
동심성 리모델링,
그러니까 조용히 두꺼워지고 비좁아지는 심장을 놓칠 수 있다고.


올해 건강검진을 앞두고 있다면
이번에는 체중계에 올라가기 전,
허리와 엉덩이 둘레를 재는 순간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봐도 좋겠다.


줄자를 배 위로 두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어색하게 내쉬는 그 짧은 순간이
사실은 내 심장의 미래를 슬쩍 보여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맥주 한 잔을 완전히 끊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잔이 아니라 허리띠를 한 번 떠올려 보는 것.
“내장 지방”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그냥 이렇게 바꿔 봐도 괜찮다.


“오늘 이 한 번의 배부름이
내 심장 안쪽 벽을
조금 더 두껍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연말 모임에서 잔을 들기 전에
허리띠를 한 번 만져보는 습관.
심장의 모양을 바꾸는 작은 출발점이
어쩌면 거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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