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불 끄기 전, 뇌를 생각했다

폐경 뒤 뇌 변화와 HRT의 한계

by 전의혁

몸은 분명 쉬고 싶은데 머리가 먼저 흐릿해지는 밤이 있다.


저녁 마감 시간. 약국 카운터 조명이 조금 차갑게 느껴진다.
약봉투를 접다 말고 손을 멈춘다. “요즘 기억이 자꾸 새요”라는 말이 오늘따라 더 또렷하게 남아서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내 몸이 다른 리듬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나도 그랬고, 특히 잠이 흔들릴 때 더 그랬다.
혹시 당신도 “그냥 나이 탓인가” 하고 덮어둔 적이 있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연구진은 폐경이 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들여다봤다.
이들은 영국 바이오뱅크 데이터를 이용해 폐경 전후의 변화를 비교했다.
폐경 증상을 위해 호르몬 대체요법(HRT)을 쓴 여성과 쓰지 않은 여성도 함께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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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은 난소가 난자 생산을 멈추면서 더 이상 임신이 어려워지는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안면홍조나 야간 발한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연구진이 더 깊게 보려 한 건 ‘뇌’였다.
폐경이 생식 건강을 넘어 인지 문제 같은 뇌 변화와도 연결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과학자들은 영국 바이오뱅크에 등록된 여성 약 12만 5,000명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들은 여성을 세 그룹으로 나눴다. 폐경 전, 폐경 후이면서 HRT를 쓰지 않음, 폐경 후이면서 HRT를 씀.
수면과 기분, 불안, 생활습관을 묻는 설문을 살폈고 기억과 정보 처리 속도를 보는 인지 평가도 함께 진행했다.


그리고 일부 여성의 MRI를 분석해 기억과 감정 조절과 연관된 뇌 영역의 회백질 용적을 평가했다.
폐경은 알츠하이머병과 연관된 뇌 영역에서 회백질 용적 감소와 연결됐다.
기억에 중요한 해마를 포함해 여러 뇌 영역에서 이런 변화가 관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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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하긴 어려운 결과였다.
폐경 후 그룹과 폐경 후 + HRT 그룹 모두에서 폐경 전 그룹보다 인지 검사 점수가 일관되게 낮았다.
기억과 사고 속도는 줄었고 반응 시간도 더 느려졌다.
다만 반응 시간의 하락은 HRT를 쓴 여성에서 덜 두드러졌다.


HRT는 반응 시간을 조금 도왔지만, 폐경과 연관된 뇌 변화를 되돌리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불안과 우울을 비교했을 때 HRT를 복용한 여성들이 두 증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다만 병력을 확인하자 이들은 폐경 이전에 불안과 우울 진단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연구진은 HRT가 원인일 가능성은 낮다고 결론 내렸다.


수면은 폐경 후 여성에서 더 나빴다.
두 폐경 후 그룹 모두에서 불면증과 피로가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HRT를 쓴 여성들이 피로를 가장 높게 보고했다.


회백질 용적 감소는 두 폐경 후 그룹 모두에서 나타났고 HRT를 쓴 여성에서 더 두드러졌다.
연구진은 이런 뇌 영역들이 알츠하이머병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리고 폐경이 여성에게 치매 비율이 더 높은 이유에 일부 작용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열감만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함께 흔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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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이야기가 나를 겁주기만 하진 않았다.
산부인과 전문의 셰리 로스 박사는 “유전은 총을 장전하고, 생활습관이 방아쇠를 당긴다”라고 말했다.
워싱턴대학교 토미 우드 박사도 결과가 여성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회백질 손실이 곧바로 미래의 인지 저하나 치매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짚었다.


오늘 밤 나는 거창한 답 대신 내 몸이 버티는 방향을 한 가지로만 정한다.
빠르게 걷기 같은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이 노년기의 해마 크기와 연결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일 일정표에 ‘짧게라도 걷기’ 한 줄을 적어둔다.
근력 운동이 폐경 후 여성의 뇌 구조와 인지 기능을 개선할 수 있다는 말도 다음 칸에 조용히 얹어둔다.
HRT를 포함해 치료나 약을 바꾸는 일은 개인차가 크니, 의료진과 상의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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