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기억을 먹고 있었다

뇌가 늙는 줄 알았는데, 배 속에서 신호가 끊기고 있었다

by 전의혁

요즘 이름이 안 떠오른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상대방이 먼저 이름을 불러줘서 망정이지, 나는 3초쯤 머릿속을 뒤졌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미 집에 다 와서.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40대 중반 넘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주변에서도 그런다.
뇌세포가 줄어드는 거라고.
해마가 쪼그라드는 거라고.


20260321 _ 장 건강이 기억력을 좌우한다 _ 2.png


그런데 최근에 네이처에 실린 연구 하나를 읽고 좀 멈칫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출발점이 뇌가 아닐 수 있다는 거다.
장이다.
배 속에 사는 세균이 바뀌면서, 장에서 뇌로 올라가는 신호가 끊긴다는 거다.
미주신경이라는 길이 있다.
장과 뇌를 잇는 긴 신경인데, 나이가 들면 그 길 위에 염증이라는 장애물이 쌓인다.
파라박테로이데스 골드스타이니라는 이름부터 복잡한 세균이 나이 들수록 장에서 늘어나고,
이 세균이 만드는 지방산이 장의 면역세포를 자극해 염증 물질을 뿜게 한다.


그 염증 물질이 미주신경을 둔하게 만들고, 결국 해마까지 신호가 안 닿는다.


20260321 _ 장 건강이 기억력을 좌우한다 _ 2-1.png


쥐 실험이다.
사람한테 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팀이 늙은 쥐의 미주신경을 자극하자 기억력이 젊은 쥐 수준으로 돌아왔다는 대목에서, 나는 괜히 아까 그 엘리베이터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뇌가 늙은 게 아니라, 장에서 뇌로 가는 전화선이 끊어진 거라면.


전화선을 다시 이으면 되는 거라면.

혹시 당신도 최근에 그런 적 없는가.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뭘 꺼내려고 열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순간.
그게 뇌 탓이 아니라 어젯밤 야식 탓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과장이 아니라, 적어도 쥐한테는 그랬다.


20260321 _ 장 건강이 기억력을 좌우한다 _ 2-2.png


연구팀은 GLP-1 수용체 작용제라는 약물로 미주신경을 자극했을 때도 같은 회복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요즘 당뇨와 비만 치료로 유명해진 그 계열 약물이다.
장 건강이 뇌 건강이라는 말이,
막연한 건강 상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로를 갖게 된 셈이다.


나는 요즘 저녁을 좀 일찍 먹는다.
거창한 건 아니고, 밤 9시 넘어서 라면 끓이던 습관을 하나 줄인 것뿐이다.
장내 세균 검사를 한 건 아니고,
그 세균 이름도 일주일 뒤면 까먹겠지만,
적어도 장에서 뇌로 가는 길이 있다는 건 기억해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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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문제라고 생각하면 손댈 데가 없는 기분이 든다.
장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오늘 저녁 메뉴부터 바꿔볼 수 있다.
그 차이가 이 연구가 건네는 말이다.


약이나 보충제를 바꾸려면 담당 의사와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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