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 걸음으로 (1)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 학교는 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람의 높은 밀도와 각자의 체온이 더해져 교실의 에어컨이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더위와 걱정이 한꺼번에 쏟아지던 날들이었다. '기록적인 폭염'이란 멘트가 방송에서 연일 보도되는 날이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습 환경이 아직까지 어려운 학교가 처한 현실이다. 언제쯤 교실이 그림 같이 꿈꾸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
때론 사람이 잊을 수 있는 망각의 존재임이 새삼 고마울 때가 있다. 여름이 더웠다는 사실이 어느 사이 피부에서 스치는 온도에 모두 잊히고 만다. 그래왔던 사실보다 각자 느끼는 감각이 먼저인가 보다. 여름 한가운데 있을 때는 가을이 오지 않을 듯 너무 요원(遙遠)한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지치지 않도록 가을이 왔다.
심지어 이제 춥기까지 하다. 갱년기 증상으로 혈액 순환이 안되어 손발이 먼저 차가움을 느낀다. 내일은 가을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고 예보한다. 쌀쌀한 기온으로 극감 한다는 기상캐스터의 말을 듣고, 옷장 서랍에서 겨울에 넣어둔 털장갑을 꺼내서 출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손발이 차가우면, 자꾸 몸이 옴츠려 들어, 날씨가 추우면 목과 어깨가 아플 때가 있다. 아픈 것은 출근을 하지 못하는 일이 더 앞서는 걱정이기에, 몸을 잘 추슬러야 한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출근한다. 10분 정도 소요되는 길은 호젓함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다. 공원 앞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숲 속 같은 가로수 길이다. 살고 있는 신도시 건축 시기와 맞게 오래전에 조경하여 무성한 느티나무들이 밀림처럼 가로수로 도열하고 있다. 여름철에 가로수 길을 걸을 때는 햇빛 한 점도 받지 않는 완전한 나무 그늘 터널이다. 그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아파트 리모델링이 시작되어 엄청난 소음을 내뿜는 공사장 안전 보행자 터널도 지나온다. 신호등을 건너 빵 굽는 달콤한 향기가 거의 사라질 정도의 거리에 갑자기 환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느 카페 앞이다. 한적한 마을의 보행자도 그리 많지 않은 뒷골목 도로 모퉁이 카페의 테라스를 보기 위해 일부러 빼놓지 않고, 꼭 지나쳐 온다. 여름에는 내내 내가 특히 좋아하는 천일홍이 찌는 더위에도 한결같이 보라와 분홍의 귀여운 예쁨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도 궁금했다. 누굴까? 지나가는 사람을 위해 늘 같은 모습으로 예쁜 꽃을 가꾸는 손길의 주인공은.
오늘도 출근을 하면서 시선이 닿는 곳에 카페테라스 꽃을 스치듯 바라본다. 오래 바라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허락하지 않지만, 그 테라스를 바라보고 올 수 있는 길이어서 아침 출근이 다소 가볍다. 가을 어느 날, 꽃이 달라져 있다. 매일 보던 천일홍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가을의 여러 꽃들이 소담하게 토분에 담겨있다. 아마 주말에 꽃시장에 다녀왔다보다. 가을꽃을 처음 보게 된 월요일, 기분이 좋아졌다. 꽃들을 위해서 토분에는 블루아이스(엘사트리), 측백, 그린라이트(억새)가 배경으로 깔리는 배치가 돋보인다. 누굴까?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여 심는 사람이. 그의 생각이 토분에 담긴 꽃으로 조금은 알 듯, 아닌 듯, 비친다.
우리의 삶은 해석이다. 어떤 의도였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풀이가 해석이다. 그렇게 해석이 되었다. "카페의 운영자는 토분의 배경을 두고, 꽃을 바꿔 심었구나", "참, 아름다운 눈과 부지런한 손을 가진 사람이구나" 그가 심어놓은 배경에 놓인 가을꽃을 보면서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의 일상도 천천히 흐르겠구나 생각하면서..
여기에 머무른다는 것은 서로의 일상을 물들이는 어쩌면 행복을 마시는 카페이기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화를 나눌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멀리 가을을 만나러 떠나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계에 맞춘 일상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의무가 있기에. 더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눈의 호강못지않게, 고작 몇 개의 화분에 담긴 가을꽃의 아름다움을 황홀하게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다.
가을에는 꽃이 눈에 더 깊이 들어온다. 가을꽃은 화려한 색감들이 더 선명하다. 첫눈이 오면 사그라들 꽃들이 한껏 피어나는 끝 날의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작열(灼熱)이다. 봄이 파스텔이면, 가을은 원색이다. 어두움이 빨리 찾아오고, 하늘이 오늘처럼 회색톤으로 흐릿한 가을날에는 강렬한 원색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첫눈을 기다린다. 아니 기다리지 않는다. 가을꽃들이 스러지는 눈이라면.
오늘도 학교 교문 앞에는 학생회장, 부회장 선거 운동으로 무척 활기차다. 공약과 자신의 특색을 부각하는 소품으로 홍보하는 친구들이 함께 나와 "기호 0번 뽑아주세요" 외친다. 그들도 아름답다. 이제 피어나려는 사람 꽃들의 몽우리를 응원하게 된다. 당선되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못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결과를 받아 들든 지나왔던 시간이 소중한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랬어도 괜찮아"
"잘해왔어"
그런 말들을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한다.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잘해왔다는 것을. 뭘 이루지 않았어도, 이미 이뤘음을.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때면 한참이나 어려운 일들을 경험한 이후가 되겠지..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일을 갖고, 그리고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부모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삶에서 무게를 견디면서 몸으로 알게 되는 진리를 지금부터 알 수는 없으니까. 지금은 그냥 중학생에 맞게 딱 그 시기에 적절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있는 이곳은 이미 사랑스러운 봄날의 꽃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