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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든요일의여행)
그리고 나의 여행

- 느린 걸음으로 (3)

by 산들바람

책(모든요일의여행)으로

떠남 프롤로그

(1인칭으로 써 내려간다)


행복을 향한 몸짓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여행 말고 또 있을까

(저자의 말 인용)


여행을 생각하시나요?

11월이니,

이제 곧 겨울방학도 가까워지고 있고,

올해는 특히 길게 있을 예정이기에...


(1)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나는 분명 아닌 쪽으로 기운다.

다녀온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출근과 수업, 업무..

교사의 필연적 일상이

오늘 하루를 걱정하는 아침의 시작과

얼른 잠들어 내일을 걱정하는 하루의 끝으로

37년을 건너왔다.


요즘 잠들기 너무 힘들어 찾은 정신과 병원에서

의사가 말했다.

"수면 강박이 생기신 것 같네요"

처방해 준 공황장애 약 반 알을 먹고서 잠들었다.

그 일로 인해서

강박이 나를 옥죄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알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어쩌다 간 여행조차

가야 할 곳,

봐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을 빼곡히 채운

여행지에서는 일상보다 더 바쁘다.


(2)

작년 겨울방학 새로운 근무 학교를 걱정하며

(걱정도 정말 병이다..)

미리 힘들 나를 위로한다면서,

튀르기예를 10일 강행군으로 다녀왔다.

(날마다 새벽 3시 기상)

분명 여행이라고 떠났는데,

관광으로 그친

고행길이었나 보다.

여행의 끝으로 몸이 무척 아팠다.

눈이 빠질 듯 피곤하고,

몇 개월동안 불면에 엄청 고생했다.


(3)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

여행답지 않은 여행을 다녀온 후

나의 취향과

나의 시선과

나의 속도를 찾으면서

우연한 행복을 찾는 진짜 여행을 시작해보고 싶다.


'지금'에 몰입하기보다

'방금 전 - 지금 - 그다음'이라는 거대한 먹이사슬 안에

살도록 길들여지고

실수 하나 없도록 감시하고

(저자의 말 인용)

계속 채찍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교사의 일상,

학교의 일상이 주는 강박을 벗어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여행.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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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요일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와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로 나뉜다.

일터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헤아리지 않는다.

모든 요일이 여행 중이므로..

저자 김민철은 '모든 요일의 여행'이라

책에 이름을 붙였다.


오늘은 목요일.

나는 언젠가부터 요일을 월요일부터 열거하지 않고

토요일에서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D-0일이라고 생각한다.

목요일이니,

D-2일이다.

토요일이 지나면 다시 시작이라

일요일은 D+1일이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해"

평일만 있는 일상이 잔인한 것처럼,

열심히 여행하는 순간만이

가득한 여행도 잔인한 것

어쩌면 여행의 낭만은

여행이 계속되는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밤의 낭만일 것이다.


(5)

여행에 또 하나 붙는 수식어는

'결점'을 만드는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간 동행자와 싸우기도 한다.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뭘 먹을까로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좋은 딸과 엄마가

무지하게 싸웠다는 동료 교사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해서 키득키득 웃었다.

나 역시나 남편과 매번 싸운다.

(다시는 같이 여행하지 말아야지..)


뭘 먹을까?

뭘 볼까?

어느 길로 걸을까? 이런 것들로..

선택이 선택과 부딪치는 것이다.


여행지에 또 오기 어렵다는 생각에

나의 선택을

꼭 관철시키고 싶은 강박이

여지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에 따르는 결점을 만들라 한다.

그 선택이 나의 여행을 만들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패키지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관광이다.


(6)

이 문장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이 뻔하디 뻔한 문장을

나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이 진실을

다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결국 이 문장은 단단한 진실이 된다.


'여행을 떠나, 나를 찾는다'

(저자 글 인용)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신다.

아흔을 넘기신 후, 눈에 띄게 몸이 예전과 달라지신다.

다리가 가늘어지고, 귀가 들리지 않으신다.

얄팍한 용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언젠가 내 곁에 계시지 않는 시간에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을 위해서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이유이다.


부모님은 전기세 아깝다고 선풍기만으로 더운 올여름을 버티셨고,

나는 10월 초 긴 재량휴업일이 꿀처럼 주어져서,

함께 여수로 향했다.

안 가신다고 하실까 봐 내가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경기도에서 출발하여 바로 당일 여수에 도착하는 무리한 일정으로

9시 넘은 시간에 돌산대교를 건너게 되었다.

화려한 밤 조명에 뒷자리에 앉으신 부모님께서

"와, 이렇게 멋진 곳에 와보다니.." 하시면서,

딸 덕분이라고 아주 좋아하셨다.


누군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이다.

더군다나, 부모님이 아기처럼 좋아하신다.

밤 운전이라 많이 피곤했던 나도 덩달아 행복하다.

여행도 귀찮다고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억지로 모시고 오던 길이라

눈치 보면서 마음 불편했던 나도

여수밤바다 풍경에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가 떠올라 저절로 가벼워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해를 향하고 있는 향일암(向日庵)으로 향했다.

나는 처음이었는데,

젊은 시절 다녀오신 부모님은 향일암 경사로를 오르면서

자꾸 옛날을 떠올리셨다.


향일암.

처음으로 우리가 여수와 사랑에 빠진 곳.

바닷가 절벽에 서서 해를 향해 있는 암자.

파란색 바다가 아니라 은색과 하늘색과 연두색이 미묘하게 섞여 빛나는 남해를 향해 있는 향일암.

그 향일암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다.

(저자의 글 인용)


아버지 손을 잡고 헉헉 경사로를 걸어 절 마당에 들어선 순간

내가 왜 향일암을 왔는지 바로 알았다.

김민철이 말한, 영원한 짝사랑의 여수 향일암,

은색과 하늘색과 연두색이 미묘하게 섞여 빛나는 풍경이 궁금해서

그 풍경이 나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부모님 곁에서.


나는 김민철처럼 김민철의 눈으로 사진에 담았다.

말로 설명된 풍경을 이제는 나의 눈으로 보면서.

김민철이 책에서 말한 나무가 "이 나무구나" 대번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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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

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2018년이니, 벌써 6년 전,

교환교수로 가있던 오빠의 초대로

Grand canyon, 라스베이거스, 유타까지

서부 3000km를 돌아다녔다.

긴 여행길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는데,

유독 한 장면만 마치 어제처럼 떠오른다.


떠나오기 전 너무나 힘들었던 학교 생활 때문인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여전히 마음은 몸을 따라오지 못했나 보다.

아마도 그날,

유타주 어딘가로 오빠와 남편이 골프장을 가자고 해서

골프를 치지 못한 내가 따라나서던 길이었다.

(나는 어이없게 캐디를 하라고 한다)

골프를 쳐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왜 미국까지 와서 골프야?, 더 볼게 많을 텐데..' 심술이었다.


18홀을 모두 돌려면 배가 고플 것이라서

오빠가 햄버거를 사가지고 가자 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맥도널드였다.

'뭔 미국까지 와서 햄버거야?'

그것도 마땅찮아서 더 짜증이 났다.


그때였다.

매장에 들어서 어정쩡 서있는데,

갑자기 나를 보더니 아가씨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Don’t worry, smile!"

그 순간,

나는 김민철처럼 뭔가가 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를 누르고 있었던 지나온 날들의 압력이며,

잔뜩 고집스러운 내 안의 고통이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뛰어나와 너를 환영해 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지도 못한 미소는

거기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짜 여행은 그곳에 있다고.

(책 내용 인용)


이상하게도 2주일 동안 3000킬로미터를 달려서

캐년과 라스베이거스 등등 수없이 많은 멋진 풍경들을 담아왔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 장면만 문득문득 생각난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간.

그 순간이 그립다.

만약 다시 간다면,

골프장 캐디도 멋지다 생각하고,

맥도널드에 가서 환한 웃음을 지을 텐데..

이제는 다시 그곳을 갈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순간이 다시 온다면 놓치지 말아야지.


(8)

나는 오늘도 여행 대신 학교에 왔다.

출근과 근무의 이유로.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도 내 인생에서 보면

하루치의 여행이다.

그러니,

오늘은 화요일의 여행이고,

학교로 여행을 온 것이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다시 보고

어디에서든, 다시는 여기를 못 올 것처럼 걸어보리라.

또 하나 깨달았다.

대단치도 않은 것에 감탄할 마음이 없으면

여행은 그저 그런

또 하나의 일상의 연속일뿐이라는 사실을..

여행자의 자격은

최고라 감탄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자라는 걸.


(9)

- 책(모든 요일의 여행) 에필로그-


때로는 여행을 떠나와

누군가의 일상이

묵묵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어이 살아야 한다.


나는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여전히 살아가는 그 모든 요일들이

오늘처럼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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