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 -
어떤 음식을 생각하면 회상이 떠오른다.
내게는 감자탕이 그런 음식이다.
한때 감자탕을 즐겨 먹었던 적이 있어서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돼지 뼈 사이에 붙어있는 듬직한 살을 발라서 국물과 함께 떠서 먹으면 그만한 음식이 없다고 여겼다.
우리 가족은 서울은 물론이고, 경기도 땅에 어떤 연고도 없는 지방 출신의 사람들이다.
저 멀리 남쪽 끝 해남에서 교사로 근무를 하면서 읍내의 나름 번화가에서 작은 행복을 누렸고,
주말에 대도시 광주에 가는 일은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호사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다.
결혼하여 살게 된 집은 32평 아파트였는데, 당시 전세가는 2천만 원이었다.
그나마 우리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 또한 호사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은 옛날 한옥집의 작은 부엌이 딸린 건넌방 한 칸을 월세를 살고 있는 교사들이 많았다.
당시 2층집은 흔하지 않았는데,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 중 한 분이 2층 전체를 세를 얻어서 살면서 동료들을 초대하여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싱크가 있는 실내의 부엌에서 밥을 할 수 있었고, 식탁이 있는 리빙 다이닝 룸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 부엌은 방보다 낮은 위치에 바깥에 있었고, 연탄 불이나 석유곤로, 부탄가스레인지를 이용하였다.)
드레스룸의 형식인 작은 방도 있었다.
큰 방에는 침대가 있었다. 당시 침대는 앵글로 짜서 매트리스가 없고 이불을 깔고 쓰던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다.
(밤에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서 느꼈던 놀라움과 부러움이 지금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해남 읍내에는 시장, 찻집, 음식점 등의 상가가 있어서 이 또한 엄청 크게 누리던 일상이었다.
언제든 전통찻집에서 대추차를 한잔 마실 수 있고, 간혹 토담집에서 낙지볶음밥을 먹거나, 대흥사로 가던 길에 다산 정약용 유배지 근처에서 닭 한 마리로 코스 요리를 만들어주는 음식점도 자주 애용하였다. 그 집은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난다. 전라도 음식은 기본으로 한 상 가득히 24첩 반찬이 나온다. 거기에 닭을 포를 떠서 숯불에 구워 먹고, 닭볶음탕을 먹다가, 백숙을 먹다가, 마지막에는 녹두를 넣어서 푹 끓여낸 닭죽을 먹는다. 마지막 닭죽을 먹기 위해서도 앞에 나오는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맛있었다.
그 맛이 그리워서 해남을 떠나온 지 30년이 넘어서 다시 그 집을 찾아가 보고 먹었다.
옛날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철저한 남쪽 끝 지방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경기도 땅에 입성하였다.
계기는 학교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읍내의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교장은 학교에 있는 교실 커튼을 모두 내게 세탁하도록 지시하셨다. 너무 황당하여,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으로 끝까지 나를 배척하셨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오니, 결국 내 자리는 TO감 처리되어 있었다.
새로 발령받은 학교는 땅끝마을의 중학교였다.
당시 차를 운전하지 못했던 나는 읍내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1시간 30분을 카풀로 동료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출근하였다.
그렇게 3년 반이 지나갈 즈음, 더 이상 이곳에서 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타시도 전출 희망으로 아무 연고도 없던 경기도를 오게 된 사연이다.
친척 한 명도 살고 있지 않던 경기도에 발령을 받아오니, 당장 잘 곳이 없었다.
여관에서 잠을 자는 것도, 당시는 무서웠던 시절이다.
발령받은 학교의 숙직실을 사용할 수 없느냐고 부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사연을 들으신 교장선생님께서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방 한 칸을 내어주시면서 한 달 가까이 우리 부부의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
뿐만 아니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사모님께서는 아침마다 밥을 해주셨고, 저녁까지 챙겨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죄송한 일이다.
학교 앞에 드디어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당시 전세가는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서 어찌어찌 해결하였다.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축에 매진하여 종잣돈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감자탕을 먹었던 시작이다.
대부분은 부모님이 보내주신 김치 등의 밑반찬으로 식사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가끔 외식이라도 해보자고 할 때마다 등장하던 메뉴가 감자탕이었다.
집 앞에 있는 OOO 감자탕 집이 단골이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간단한 놀이기구도 한편에 있어서 여러모로 좋았다.
맛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감자탕의 추억을 잊고 싶다.
나에게는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외식의 호사가 감자탕이었으니..
젊은 날의 고생치고는 비록 큰 어려움은 아니었을지언정, 내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음식이 되었다.
오늘은 설 연휴의 첫날이다.
작은 아들이 갓 결혼하여 며느리와 함께 집으로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집밥의 설 요리로 나물 3종류, 전 3종류, 아들이 좋아하는 조기, 그리고 LA갈비 등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옛날 감자탕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이들도 그때 먹었던 감자탕이 괜찮았을까?
아들에게 물어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안에 품격을 갖춰야 한다고 요즘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자주 애용하는 마켓 OO의 라운지에서 사람들이 구입한 재료로 멋들어지게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따라 하고 싶다.
맛도 중요하지만, 어떤 그릇에 담아내고, 어떻게 차림 하는지도 중요하다.
한 그릇 안에 정성이 담긴 사람들의 요리를 보면 절로 감탄이 된다.
머리로 품격 있는 밥상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우아하게 천천히 먹는 식사의 여유도 알고 있다.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이나 맥주, 막걸리 등의 멋도 부리고 싶다.
음식과 식사의 기본 값은 맛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아직도 감자탕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바쁘니까, 배만 고프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일어나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바쁜 시간에 후딱 해치우듯 먹어대던 음식이다.
설거지감을 줄이기 위해서 냉장고에서 반찬 그대로 꺼내서 먹기 일쑤다.
혼자 있을 때도 그릇에 담아내서 우아하고 품격 있는 식사를 하는 작은 일이 아주 큰 일이다.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나에게 먹여주는 밥상의 품격일 테니..
그러려면, 더 고생해야 하나?
더 많은 시간을 요리에 투자해야 하나?
아무튼 라면 한 그릇도 예쁘게 담아서 천천히 우아하게 먹고 싶다.
요리가 그럴듯하지 못해도, 먹는 행위는 천천히 하는 것이 오늘부터 가능하니까.
감자탕을 다시 먹어봐야겠다.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