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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공책

- 마음 풍경 -

by 산들바람

아버지는 1936년 乙亥生으로 올해 91세가 되셨다.

1958년부터 4월 7일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1999년 8월 31일까지 총 38년을 13개 학교를 옮겨 근무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보내주신 아버지의 공책을 보고 알았다.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절대적으로 함께 한 시간은 내 생애에서 과연 몇 시간이나 될까?

아버지는 혼자 계시는 시간에 뭘 하시고 계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겪으셨던 모든 생애를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적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먼 친척을 찾아가고, 배에서 뱃사람 밥을 해주던 어린 시절의 사연을 바로 얼마 전에야 들었다. 막연하게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 어렴풋하게 추측했는데,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바닷가 근처를 지나가던 중 갑자기 그 사연을 떠올리시고는 혼잣말처럼 '그때는 참 배가 고팠어'라고 말씀하셔서 이제야 비로소 깊이감 있게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감히 짐작도 하지못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것이 세 가지이시다.

야구 관람, 사교댄스. 그리고 마지막은 기록이다.

보청기를 끼셔도 잘 들리지 않는 난청이시면서 광주KIA 타이거즈의 열렬 팬이시다. 야구 경기가 중계되는 날은 그 어떤 일로도 TV 시청을 막지 못한다. KIA가 이기는 날에는 시청을 하시면서 마치 어린 동자승이 웃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치신다. 반대로 지는 날에는 선수들에게 욕까지 퍼부으면서 심란해하신다.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만 알았다.

나도 가끔 아버지와 함께 기아 야구 경기를 관람한다. 보다 보면 또 재미도 있다.

아버지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이 나에게 얼마나 남아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나와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신다. (그나마 어머니와 함께 계셔서 다행이다.)

아버지의 하루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었을까?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짐작조차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책상을 보고 알았다.

그 책상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손자가 20년 전에 쓰던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방에 침대와 작은 TV를 사드려야 한다고만 생각했고, 책상의 의미와 필요에 대해 짐작도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책상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책상에는 모나미 볼펜과 한자 옥편 그리고우리말 큰 사전이 놓여있다.

지나간 달력의 뒷면을 묶어서 공책을 만드셨다.

모나미 볼펜은 아버지의 애착 물건이다. 잉크가 다 떨어지면 볼펜심을 갈아 끼워가면서 계속 쓰시던 것이다.

그 볼펜이 더 이상 여기저기서도 구할 수 없어지자, 나에게 SOS를 보내셨다. 온라인으로 구입하여 볼펜을 넉넉하게 검은색, 빨간색 3타스를 보내드렸는데, 배송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도 견디지 못하시고 겨우 한 자루를 우체국에서 얻으셨다고 하셨다.

모나미 볼펜! 뭐든 아껴 쓰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필기구 이상의 물건이다.


아버지는 공책에 우리 집의 족보, 그리고 작은 집의 족보를 먼저 적으셨다.

十干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적으시고, 十二支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적으셨다.

60 갑자를 기록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가족 모두의 탄생일이 어떤 띠의 무슨 해인지를 헤아리기 위함이시다.

2021년부터 2042년까지 각자의 나이와 60 갑자로 어떤 해인지를 적어놓으셨다.

가훈도 적어놓으셨다. '凡事를 一心同體로 돕고 해결한다'. 우리 형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훈으로 정하셨으나 정작 우리를 모두 모아놓고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도 부끄럼을 타신 듯하다. (ㅎㅎ)

아버지의 공책은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우리 집의 역사 기록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한자 옥편과 우리말 큰사전을 펼쳐놓고 공책에 한자성어와 뜻풀이를 적으셨다. 한자는 한글로, 한글은 한자로.. 그래서 사전이 필요하신 것이다.

그 말의 뜻을 새기면서 마음에 적으시는 것이시고, 아울러 한자씩 새기신 것이다.

여수여행을 함께 가던 중, 차 안에서 '俎上肉이 무슨말인지 아느냐?'라고 물으셨다. 도마 위의 고기라고하신다.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을 말한다고 일러주신다.

요즘은 내가 보내드린 대학, 논어, 채근담 필사 노트를 따라 쓰신다. 금강경도 따라 적으신다. 한자 문제집을 보내드렸더니, 한자를 적으시고 풀어보신다. 최근에는 노트에 영어 문장도 따라 적으시기 시작했다.

영어의 뜻을 알고, 어떻게 읽는지 알고 싶으니 영어 사전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공책은 공부의 흔적이다.

문득 최진석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글을 기다리는 종이는 온몸을 펴놓은 피부다.

쓰기는 피부가 된 자신을 긁는 일이다.

피부를 긁어야 자기에게로 가는 초인종이 울린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간혹 손 편지를 보내신다.

꾹꾹 눌러쓰신 당부와 사랑의 마음이 담긴 글이다.

전 국민이 모두 핸드폰을 사용하는 이 시절에 나는 아버지만의 핸드폰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불효막심이다.

아버지와 연락이 안 되는 어떤 일이 있고 나서 당장 핸드폰을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해드렸다. 함께 2박 3일 사천 여행지 숙소에서 줄곧 아버지에게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방법, 문자를 보내는 방법, 사진을 찍고 전송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렸다. 2G 폰이라서 문자를 보내는 방법이 매우 어려워 노트에 기록해 가면서 메모하여 연습을 여러 번 함께했다.

요즘은 아버지가 하실 말씀을 손 편지가 아닌 문자로 보내신다.

그 문자에는 꼭 붙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의 하트다.



우리에게 누군가의 공책과 기록의 의미는 표현이다.

그 표현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다해야 할 삶의 의무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아버지의 공책이 나에게 말을 한다.

나는 아버지를 이제야 한 사람이 세상에 온 전 우주적 존재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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