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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엘만 이 년째.

- 마음 풍경 -

by 산들바람

피아노는 먼 그대와 같은 물건이다.

그립지만,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 부끄러워 근처도갈 수 없는 존재.

피아노는 그냥 악기이기 이전에 감정과 엮여있는 존재감으로 나에게는 인식된다.

멀리 있지만, 가까이 가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지만부족하기에 또 가까이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어려운 것 사이에서 피아노는 머리와 마음으로만 그려지는 것이다.


피아노 학원에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

내 안에 자리 잡은 경계 하나를 허물던 날이다.

'꼭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못해도 되잖아!'라는 괜찮은 생각 하나를 붙잡았다.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감을 뽐내는 피아노이지만, 그냥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부끄러운 생각을 애써 누르면서 원장님께 피아노에 대한 오랫동안의 짝사랑을 고백했다.

그날부터 바이엘을 손으로 배워야 했다.

바이엘 교재 앞에 단어 하나가 더 붙어있다. '어린이 바이엘'이다.

피아노 앞에서 어린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의 의미를금방 알았다. 어린이들은 감각적으로 피아노를 배운다.


피아노는 머리로는 절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악보가 손으로 반사되어 거울처럼 하나로 움직이는 놀라움 자체이다.

그런데 나는 피아노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눈으로 바로 읽지 못하는 악보는 내 손을 붙잡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피아노 앞에 손가락은 움직이지 못하고, 반대로 머리가 움직이고 있다.

악보 줄에 그려진 콩나물들이 어떤 계이름인지를 머리로 한없이 세어본다.

오선지 몇 번째 칸, 몇 번째 줄에 있는 그 콩나물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어떤 순간은 머리가 하얗다.

'이게 뭐냐?' 그렇게 그냥 멈춰있게 만들고 만다.


원장님의 레슨으로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서 오른손 높은 음자리까지는 어찌어찌 손가락이 더듬거리면서 움직였다. 이제는 왼손으로 낮은 음자리를 배워야 했다.

같은 오선지에 낮은 음자리의 계이름이 다르고 왼손은 오른손과 다르게 움직여야 하니, 또다시 쩔쩔맸다.

어린이 바이엘에는 악보 위에 숫자가 적혀있다. 손가락에 번호를 붙인 약속이다. 오른손은 엄지부터 1번이고 새끼손가락은 5번이다. 왼손은 반대로 새끼손가락이 1번이다. 이것도 처음에는 얼마나 혼동이 되는지..

4번이면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어디인지 자꾸만 혼란 자체였다.

손톱 위에 숫자를 적고 연습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손가락은 그냥 멈춰서 갈 곳을 모르고 있어서 피아노 자존감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두 손가락 열 개가 피아노 위에서 어느 손가락 하나도 열외 없이 모두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고, 마치 허들을 넘어가는 것처럼 흰건반과 검은건반으로 가볍게 뛰어놀아야 했다.

피아니스트는 사람으로 최고의 가히 경이로운 존재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악보를 읽어내며, 손가락이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주자의 아름다운 감정이 실려서 놀라운 음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


내 앞에 오선지 위에서는 다시 샵#과 플랫 b의 존재가 나타났다.

자꾸만 높은 산들이 가로막는 그 막막함이 여기에서 멈춰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냈다.

'못하겠어. 이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

'도, 레, 미, 파, 솔, 라, 시'가 'C, D, E, F, G, A, B'로 계이름을 붙이고, 장조와 단조의 차이를 알아가는 것도 그야말로 피아노 앞에서 한없는 어린이 어른이다.


피아노는 아들들이 어릴 때 집에 있었는데, 조금 배우다가 너무 싫어해서 먼지만 쌓여가던 중 오래전 팔아버렸는데 집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피아노가 집에 없어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손가락을 짚어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 연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음으로 들릴 것이라서 덜컥 피아노를 들여놓고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당근 마켓에서 디지털 피아노를 나눔 받아서소리를 죽여놓고 건반 연습을 하였다.

아주 낮은 수준의 곡이라도 한 곡 정도 더듬거리듯 리듬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소망이 붙잡고 있었다.

'노출 시간을 늘리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 단 하나. 자꾸 하다 보면 낯설게 느껴지는 피아노 존재감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하나로 포기하려는 마음을 잠재우고 있었다.


피아노 학원 원장님과 레슨 약속이 있는 날이면 긴장으로 그날을 피하고 싶었다.

평상시 혼자서 어찌어찌 넘어가던 악보의 손가락 움직임도 원장님의 전용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나마 손가락이 멈춰버리고 '이게 뭐였지..'만 생각하면서 너무 부끄러웠다.

기대와 좌절 사이에서 역시나 좌절 쪽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린이 바이엘 상, 하 두 권을 모두 배웠다.

(어떻게 쳐야 하는 지를 머리로 알았다는 것이고, 손으로 칠 수는 없다는 뜻이다. ㅎ ㅎ)

바이엘 다음은 체르니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상태로 넘어갈 수 없었다.

진도를 나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연습이 충분히 되어야 했기에.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피아노 앞에 앉을 수도 없을까?

피아노 앞에 앉은 순간은 ‘못 쳐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니, 그냥 좋았다.

더듬거려도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서 퍼져 나오는 그 소리는 연주는 아니다. (남이 들으면 소음이다.)

그런데도 그 음의 느낌이 어렴풋이 느껴지고, '내가 피아노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저 좋다.

바이엘만 2년째 붙잡고 있으면서 피아노 앞에서 멋진 연주를 꿈꾸는 마음은 저 멀리 두고, 그저 건반을 누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는 나에게 말했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같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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