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 -
달려가는 시간을 잠시 붙잡는 것이 달력이다.
오늘도 달력을 본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만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다.
메트란폴리탄 미술관 작품의 매일달력,
그리고 열 두 그림을 담고 있는 달력.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달력이 며칠 전 내게로 왔다. 그림 작품을 담고 나에게 선물로 왔다.
실은 그림을 그린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고 싶다.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만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으나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열 두 그림을 담은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그림을 그린 그녀를 자연스럽게 떠올려보게 되었다.
나는 열 두 그림을 모두 한 장씩 사진을 찍고, 한 작품을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얼마 전에 역시나 선물로 받은(ㅎ ㅎ)김정운 교수님의 '창조적 시선' 책 내용이 떠올랐다.
이 책은 Unit 1 ~ 126까지 10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벽돌책이다. 물론 더 놀라운 것은 내용이다.
우리가 살아갈수록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주제는 '창조'라는 개념이라고 한다.
압도적인 책 두께이지만, 밑줄을 수없이 그어가면서바우하우스 예술 이야기, 편집의 창조적 에디톨로지이야기, 기술 이야기, 그리고 역사 이야기 등 한 사람의 사유의 세상이 이렇게나 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가 질렸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바라봐야 하는구나' 새로운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요즘 나는 심심하면 Google Arts & Culture에서 미술 작품을 보고, 소리와 색, 상상 너머의 '감각의 창조적 실험'을 경험하고 있다. 정말 엄청난 일이다.김정운 교수님의 '색을 듣고', '소리를 보는' 감각의 창조적 실험의 장에서 사유의 경계를 넘어서보는 연습을 해본다.
그러다가 열 두 그림을 담은 이 달력을 만났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감각의 교차 편집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ㅎ ㅎ) '상상은 자유니까..'라는 면죄부를 나에게 부여하면서.
지금 내 눈으로 보이는 열 두 그림을 이제 글이라는 언어로 풀어써보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림을 언어로.. 그렇게 열 두 그림을 글이라는 표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먼저 열 두 그림 달력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그림 작업을 상상하면서 떠올려봤다.
내가 생각해 본 시나리오는 이렇다.
그러니까 작년 날마다 살아가면서 어느 날 눈에 들어오는 어떤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여러 장이 거듭되고...
이제 그림을 그릴 시간이 되었다.
어느 달에 찍어놓은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진을 하나 고른다.
그리고 그 장면을 캔버스에 그날의 감상을 떠올리면서 그린다.
물론 올해의 시간이 오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렇게 1월부터 12월까지 열 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 나는 상상한다.
1월
고목, 곧 나목이다. 살아있다는 흔적은 단 하나 쓰러져 있지 않다는 것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홀로 서있다. 그런데 눈이 내린다. 어느 장면에서 이 나무를 보았을까? 한 해 시작이 쓸쓸하다.
그럼에도 평화롭다. 눈 때문이다. 고요한 밤 가운데 눈이 내린다. 평화롭고 조용하게 한 해를 시작하는 화가의 마음이 나에게 보인다.
2월
금요일까지의 근무를 마치고, 이제 집으로 퇴근하는저녁.. 고속도로는 한없는 차량의 정체다. 건너편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가는 방향의 차 후미등만이 빛을 낸다. 가로등이 멀리까지 집으로 가는 길을 비추고 있다. 저녁 어스름의 하늘빛은 보랏빛이다. 아마도 하늘빛에 매료되어 이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언제나 집으로 가는 길은 포근하다. 나는 이 그림이 여행을 떠나는 길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라 느껴진다. 멀리 하늘빛이 어두워져가는 그 시간 속에서 향할 곳은 바로 안온한 집이다.
3월
동백 冬柏이다. 몇 년 전에 지심도에 갔다. 동백꽃을보기 위해서다.
질리도록 보고 싶어서 배를 타고 내려선 지심도.
바람이 불어 붉은 꽃이 뚝 떨어져서
발 위에 살포시 얹어진다.
검푸른 마음에도, 내 입술에도 동백꽃이 핀다.
꽃처럼 붉은 열정이 내려앉는다.
남해 섬마을 끝자락 아직은 추운 날,
봄이 먼저 열리는 길에
동백이 피거나 지거나, 살아있거나 사라지거나,
사람들이 머물거나 떠돌거나
오늘 내 마음은 동백 빨강이다.
빨강으로 말하고 동백으로 물들인다
나의 마음에 동백을 포갠다.
4월
고양이 두 마리가 길거리에서 사람을 본다. 등을 세우고 있는 고양이는 잔뜩 경계를 세워 화가를 보았을 텐데, 아량곳하지 않고 고양이를 향해 애정을 표하고 있었을 장면이다. 어느 곳을 불쑥 지나가도, 그곳의 시선은 고양이가 뺏어간다. 고양이를 한없이 바라본다. 나를 경계해도 소용없다. 그냥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다.
5월
전원주택의 로망으로 전원주택에 들어가 4년을 살았다. 이사를 들어가던 달은 4월이었다. 마당에는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가장 밑바닥에는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꽃을 마음껏 심는 일이다. 그랬으니, 이사 들어간 며칠 후부터는 마당에서 살았다. 주말에는 호미를 들고 살았다. 4월에는 마당에서 호미로 할 수 일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너무 일찍 심은 텃밭 채소는 얼어 죽었고, 그때는 잡풀도 뽑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 눈에 포착된 '잡초 풀'이 보였고, 그것을 무지막지 뽑아냈다. 다행히도 나중에 몇 개가 살아남아서 5월이 되어 꽃을 피웠다. 금계국이었다.노란색 꽃잎이 가운데 수술을 두고 마음껏 활짝 열려서 바람에 살살 날리는 그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잡초풀이라 생각해서 그 꽃들을 몽땅 뽑아냈다. 전원주택 로망의 실패 흑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화가는 5월에 금계국을 그렸다.
화가는 내 마음과 뭔가 통한다.
6월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추선 차들이 멈춰있다. 화가의 시선은 멀리 향하고 있다. 가는 방향은 툭트여 있고,오는 방향의 차들이 더 많다. 하늘은 새벽녘인 듯하다. 아마도 출근하기 위해서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길인 듯하다. 멀리 희망이 보인다. 가는 길이 한적해서, 출근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인 듯하다. 출근하는 월요일 새벽이 왠지 즐거워 보인다.
7월
화가는 밖에 서서 방을 바라보고 있다. 저기 불이 켜진 방이 화가의 방이 아닐까? 새벽 일찍 잠시 외출하여 올려도 본 내 방의 풍경, 불이 켜진 방에는 노트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이 놓여있다. 사람은 없지만, 현재 진행형의 컴퓨터 작업은 바쁜 업무를 말하고, 정신을 깨어 일해야 하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필수. 더 열심을 내야 하는 7월이다.
8월
붉은색 지붕 위로 구름이 뭉실하다. 8월의 한낮. 한없이 짙은 초록의 나무에는 매미들이 고막을 찢도록울어제킬 것이고,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한여름이다. 비를 기다리는 구름이 하늘 한가운데 떠있다. 뭉게구름 마냥 8월 또한 지나가기라..
9월
까맣다. 하늘과 그리고 아파트.. 손톱 초승달이 음력 3~4일에 동쪽에서 아침 9시에 떠있다가, 태양빛에가려서 안 보이다가 저녁 9시경 해가 질 때 서쪽으로 잠시 보이고 금방 사라진다. 유난히 별도 많이 떠있는 하늘이다. 쾌청한 9월 음력 초, 사방은 어두운데 초승달, 별빛, 아파트 불빛, 가로등 불빛이 빛을 낸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 사는 세상은 비록 어두워도, 빛을 따라가면서 살아갈 이유가 있다.
10월
이제 고양이는 나무 위를 바라보고 몸을 주욱 늘려 나무에 기대 서있다. 나무에는 열매가 달려있다. 열매를 먹고 싶기 때문일까? 아님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 위에 다람쥐라도 있을까? 아무튼 고양이는 귀엽다. 특히 고양이의 코와 입은 압권이다. 그냥보게 된다. 귀여운 존재는 그런가 보다. 상대가 어떻든 상관없이 이쪽에서는 열고 다가서게 되는 매력을지녔다.
11월
천지에 노란 은행이다. 모든 것을 덮어놓은 은행 잎이 이제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잎이 나가떨어진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기 시작한다. 어디든 새로운 곳으로 바람결에 맡겨져 흘러갈 것이다. 끝이 보이는 11월.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나태주)
아직 한 장 남은 너를 위해서 잠시 숨도 고른다. 그림 안에 넣어진 벤치에 앉아서 숨 가쁜 날들 잠시 고르면서 나를 다독인다.
12월
숙제를 모두 마친 그런 기분이다. 하늘 가운데 햇빛은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말해준다. 드디어 와버렸다. 12월의 태양은 아직 하늘 가운데 있으나, 구름 속에 숨었다 나왔다. 하늘은 어둡기만 하고, 태양은 노을과 함께 지는 거야.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구름은 걷히고,
노을은 빛나고,
인생은 아름다워요.
우리의 사랑은 계속될 것이며,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도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의 오늘은 물러갈 뿐이다.
- 열 두 그림을 그려준 분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