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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꿈꾼다.

- 마음 풍경 -

by 산들바람 Feb 24. 2025

겨울방학이 끝나간다.

3월 4일이면 2025학년도 입학이자 개학 날이다.

겨울방학은 학생과 선생님들에게 지친 마음을 쉬면서 새롭게 폭풍처럼 몰아칠 앞으로의 날들을 위해 자신을 위로하는 채움의 시간이다. 쉼과 채움으로 방학이 소중하다.

겨울방학 끝자락, 무엇으로 나를 채울 것인가?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작년에 몇 차례 다녀온 캠핑이나 글램핑을 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답답하면 무조건 차를 타고 속초, 강릉, 고성의 겨울바다를 향한 변주의 일탈도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다

집안이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더 넓은 생각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좁은 책상 위에서도 생각은 저 멀리 뻗어나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지 살짝 느낀다.


오늘도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지만, 머리로는 멀리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다녀온다.

얼마 전 다녀온 국립중앙박물관의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여파다.

비엔나에서 19세기말 변화를 꿈꿨던 예술가들의 활동과 모더니즘으로의 전환 과정을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 총 191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세기말 새로운 시대, 예술의 자유를 찾고자 구스타프 클림트가 창립한 비엔나 분리파의 역할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동을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획 전시회였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등 회화, 드로잉, 포스터, 사진, 공예품 등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수풀 속 여인,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박물관에서 현장구매로 표를 끊고 전시회에 들어서니, 작품들이 하나하나 내 앞에 다가왔다.

내가 작품 앞으로 걸어갔으나, 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 작품들이 나에게 다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마다, 그리고 조형물마다, 포스터마다 표현이라는 수단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 표현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았으나, 머리와 가슴으로는 가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미술관에 가고 싶으나, 미술관에 가면 그 앞에서 답답한 좌절을 느낀다.

작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안목의 세상이 너무나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미술작품을 보면 작품을 보았으나, 다시 그 작품 앞에 서면 처음 본 듯한 느낌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작품을 공부하듯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그린 그림이고, 어떤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해석과 설명에 집중한다.

알아야 보인다.

알지 못하기에 무엇으로 봐야 하는지 보는 눈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기준을 찾느라 바쁘다.

작품의 해석은 관람객의 몫일 것이고, 그 주관적인 느낌이 안목일 것이다.

온전히 작품 앞에 서서 그 작품 앞에서 엄청난 전율을 느끼는 사람의 안목의 세계는 내게는 요원하다.

보다 보면 알게 될까?

많이 보면 알 수 있을까?

미술 작품 앞에서 앎의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림 앞에서 나는 또 하나의 앎의 질문을 하였다.

떠오르는 단어가 '맥락'이다.

이 그림의 맥락은 무엇일까?

화가는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그 시절의 어떤 상황에서 이 그림이 나왔을까?

나도 모르게 맥락에 관해 알고 싶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에 관한 맥락속에서 그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의 어느 지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기에 이런 생각들로 그림 자체가 갖는 아름다운 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해설이나 작품 설명을 읽고 그림의 어떤 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 후에 그림을 보게 된다.


뭔가 내 안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이것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작동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서랍에 채우는 것처럼, 그림 하나하나를 맥락을 가지고 서랍 안에 정리하고 싶은 생각은 어리석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맞는 지도 잘 모를 만큼, 무지하다.

(높은 품격의 아비투스의 사람은)

그림을 보고 - 바로 느낄 것 같다.(ㅎㅎ)

(나는)

그림을 보고 - 잘 모른다 - 그래서 맥락을 알고 - ‘그렇게 봐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 그나마 느낀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르고, 어찌 되었든 비엔나에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분리파를 결성하고, 그들이 함께 지금과 같은 표현주의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이해했다. 맥락을 모르는 채로 구스타프 클림프,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 오스카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에곤 실레.. 화가들의 이름을 적어본다.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과 화가들의 이름을 연관 짓는것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이나마 화가의 이름과 작품들을 열거하는 것이라도 남겨두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남겨놓기 위한 기록의 의미이다. 느낌을 적을 수 없다. 언젠가는 느낌도 적을 수 있을까?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미술의 맥락을 찾게 되고..그리고 감동의

전율을 느끼게 될까?

미술 작품의 감동 연관 사슬이 맞춰지는 날이 언젠가는 있지 않을까 한 번쯤 꿈꿔본다.


이 전시회는 이름은 '비엔나 꿈꾸는 예술가들'이다.

나도 꿈꾼다.

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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