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나를 모를 뻔했다.

- 마음 풍경 -

by 산들바람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았다. 음악을 듣는다. 그냥 흘러나오는 음에 내 마음도 같이 흐른다. 주로 피아노 연주곡이다. 때로 맑고 청아한 바이올린 연주곡 소리가 들리면 그 곡을 따라 내 마음도 같이 오르내린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는 내 마음을 잠재운다.


사람의 두려움은 원인을 몰랐을 때 가장 커진다고 한다. ‘어, 왜 이러지?’라고 마음에 한 번 겨울눈이 내렸고, ‘또 왜 이런가?’라고 마음에 싸라기눈이 덮였고, ‘자꾸 왜 이런가?’라면서 끝없이 이유를 깨 묻다가 그 눈들이 쌓여서 커다란 눈덩어리로 뭉쳐서 결국 눈사태가 되어 마음에 쏟아져 내렸다. 나는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두렵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일이 생겼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너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결국 불안공황장애로 이어져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그렇게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강한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 허세였음도 알았다. 두려움의 정체는 무서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소방학교에서 진행한 학교 안전사고 예방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연수 진행 내용으로 실제 불이 난 경우 연기로 덮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서 사방이 어둠으로 갇힌 모의체험 동굴로 들어가게 하였다. 나는 그 동굴 안에서 '이곳은 가상의 공간이다'라고 아무리 생각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막혀있는 그 어두운 공간에서 만약 앞사람을 붙잡지 못했다면 무서움 가운데 어떻게 행동했을지 가늠이 안될 만큼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 동굴을 나오기까지 겨우 몇 분의 시간 동안 하얗게 질렸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평생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삶인가 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정확하게 똑바로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이 인생 후반부에도 알아가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두려움 가운데서 나를 알아가고 중이다. 그 무서움을 감지하는 더듬이 감촉이 다른 사람보다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대해 집착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맞닥뜨린 문제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풀어내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성향이 장점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집착의 성향이 짙어서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가 있으면 그다음 문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그 문제 하나를 끝까지 풀어보려고 집착하다가 다른 더 쉬운 문제를 풀 시간도 허비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공부하던 학생 시절 나의 공부 방식의 문제였다. 집착이 강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그 문제를 가지고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알게 되면 그 기쁨이 컸으니, 아마도 끝까지 풀어보고자 하는 의지에 불씨를 키웠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착이었다. 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어느 정도 선에서 그대로 두고 다음 문제로 나아가면 되었는데, 그 문제를 풀지 못하면 그다음으로 나가지 못했다. 시험 시간은 제한이 있었다. 만약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시험의 첫 문제로 나오면 마음은 엉망으로 흐트러져서 당황해서 결국 시험 전부를 망치는 우를 범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고야 말아야 한다'. '그 문제가 전부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는 끝장이다.' 나는 모든 문제를 다 풀고 싶은 욕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내 실력이 또는 내 지능 수준이 이 정도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경쟁의식도 강했다. 끝까지 가면 못해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끝없이 나를 몰아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남에게 지고 싶지 않았고, 풀 수 없는 문제를 풀지 못하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잘못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집이 세다. 사람이 자신을 대할 때는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럽다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정말 고집이 센 사람이 분명하다. 문제 앞에서, 이런 모습이 문제였음을 이 나이에 조금씩 깨닫는다. 나는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으로 더 나은 가벼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살 뻔했다.


사람이 밤이 되면 자야 하고 잠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지 않은 큰일이 되었다. 하루를 지배하는 거대한 쓰나미처럼 온통 내 마음과 일상을 통째로 흔들어버렸다. 나는 헤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유를 알려고 했으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유를 찾지 못해서 두려웠고, 그것이 공포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온갖 의료적 진단과 처방, 운동 그리고 음식 등.. 그 모든 백방의 노력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때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 두려움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나는 내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지금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온전히 겪어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조금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제 집착력이 강한 사람. 그런 성향이 문제였다고 나름 이유를 생각해 본다. 가볍게 여기지 못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 끝없이 헤매다가 그 문제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사막에서 급하게 샘물을 찾는 마음의 갈증을 심하게 느끼며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다. 일상의 이야기 말고, 지금 벌벌 떨고 있는 두려운 마음, 마음의 옷을 모두 벗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그대로 들어줄 사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 마음의 옷을 입은 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옷을 벗고 나니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해라’라고 판단하고 조언해 주는 사람 말고… 마치 벌이 꽃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상담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없었다. 쿨하고, 가볍게 내 마음의 무게를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내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지 몰랐다. 나는 어두운 동굴 가운데 내 앞사람의 옷을 잡으면서 겨우 걸어 나온 것처럼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사람을 찾았다.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상담 선생님을 찾아 급히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전화 상담을 하는 동안 마음의 안정이 조금씩 찾아왔다. ‘괜찮아요. 그건 당연한 마음이에요..’라면서 내 두려움을 잠재워주셨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평안도 그저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실은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지금껏 무엇으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었는가?

그 모든 질문들이 두려움 앞에 쏟아졌다. 나의 그런 질문들은 무엇보다 당연했던 현실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느끼는 생소한 기분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깊은 두려움이 나를 알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생을 '나를 위주로 하는 삶'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나의 문제 집착과 해결 의지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문제 그대로 가져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도 깨달았다. 어쩌면 생은 모두가 각자의 짐으로 무겁게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병원들을 찾아다니면서 환자가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예약 후 서너 달, 실제 병원 의자에 앉아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사실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특히 정신과 병원에서는 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5분의 시간을 위해서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아픈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픈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가져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벼울 수 없는 것이 삶이었다.


어쩌면 내 두려움과 병의 원인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두려운 마음을 그렇게 무겁게 내 마음에 짊어지려고 해서 무거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브런치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어느 구절에 마음이 깊이 공감하며 다가왔다. 법륜 스님의 인터뷰 <스스로에게 사로잡히지 말라>는 글귀였다. 작가가 스노클링으로 물속에서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화두의 말이었다. 나에게도 주문을 왼다. '나에게 사로잡히지 말자'

물건이면 무거우면 내려놓을 텐데, 나는 왜 들고 있으려 했을까?


무거우니, 내려놓자. 무거우니 들고 있지 말고. 그냥 발아래에 내려놓자.

늘 듣던 '내려놓음'이라는 단어의 절절한 의미를 정말 몸으로 새긴다.

제발 이제 그만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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