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감성에세이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 위로법)>이 발간되었습니다.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비 내리던 날, 천천히 신발 안에 물이 고이는 느낌을 느끼며 집에 가던 길이었다.
지금 당장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난 유치원과 집의 중간지점에 서있다.
‘유치원으로 돌아갈까? 집으로 빨리 갈까?’
잠시 고민한다. 아니다! 너무 급하다! 집으로 가는 길 중간지점쯤, 어느 집 담장 앞에 어른 키 세 명 정도 되는 길이의 담이 하나 더 세워져 있었다. 그 담장은 양쪽이 뚫려있어 종종 그 담벼락 안쪽을 지나 집으로 가곤 했다.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 들어 난 그 사이담을 좋아했다.
그리로 들어가 쉬를 해야겠다. 그런데, 폭이 너무 좁아 우산이 들어가지지 않는다. 우산이 원래 세워져 있던 담과 사이담 사이의 입구에 걸려버렸다.
“에잇! 에잇!”
우산을 넣으려고 몇 번 시도하던 중, 바지에 오줌을 싸버린다.
그 느낌의 강렬함만큼 우산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도 천둥소리 같다. 느낌은 잠시 뿐, 바지에 오줌 싼 것이 당황스럽고 창피하다. 누가 보진 않았을까 주위를 살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엄마 생각이 난다. 바지에 오줌 쌌다고 혼나진 않을까 걱정된다. 투둑투둑 빗방울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다.
“유치원 잘 다녀왔어?” 엄마가 웃으며 반겨주신다. 엄마를 본 나는 ‘왕~’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다음 기억에 나는 안방 이불 안에 폭 감싸져 있다. 방금 씻은 비누 향기가 부드럽게 코를 감싼다. 방바닥의 따뜻함은 빗속에서 실례를 하고 난 후 바지의 축축하고도 따뜻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기분 좋은 따뜻함이다. 보송보송한 이불과 함께 방바닥에 누워본다.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든다.
안방 이불 안에 폭 감싸져 있던 그 포근함은 집으로 오면서 들었던 모든 잡념과 걱정을 날려 보내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나이 들면서 세상 풍파에 받은 상처를 엄마가 예전에 나에게 줬던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감싸볼 수 있을까? 그렇게 부드럽게 만져질 수 있을까?
지난 새벽 살짝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공기가 뺨을 적시는 아침, 아들을 학교 앞에 데려다주고 네 살배기 딸과 함께 어린이집으로 가는 공원길을 달린다. 딸은 킥보드를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잘 탄다. 중심을 잡으며 앞질러 가는 딸을 쫓아 함께 달린다.
촉촉하게 젖은 공원 바닥의 폭신한 느낌이 운동화를 통해 내 몸에 느껴진다. 달리며 뒤돌아보고 ‘까르르’ 웃는 딸아이의 웃음소리에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직장상사, 동료직원, 고객에서 시작하여 부모, 형제, 친구, 그리고 결혼해서는 시댁 가족, 남편, 자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처를 받아내고, 또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바람을 쌩쌩 가르며 달려가는 딸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내가 그 웃음소리가 되어볼수는 없을까? 그렇게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여유 있고, 간섭받지 않으며, 어떤 걱정도 없었던 그 시절의 내가 되어볼 수 있을까? 동심의 세계로 한껏 나를 밀어 넣으면, 내 마음이 열려 도대체 내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연민self-compassion은 자신의 고통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고, 나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피하거나 연결을 끊으려 하지 않는 것으로, 결국은 나의 고통을 경감하려는 욕구와 나를 향한 친절함의 감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편안하게 ‘자기연민’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그리고 ‘자기’신, 그 어떤 신이든 자기연민의 마음을 실어 눈을 감아 기도해보자.
이 글은 신간도서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 위로법)>에서 발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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