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관계’의 측면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간다.

관계에 지친 나를 위한 쉼

by 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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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


마음에도 에너지가 있다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은 무엇일까? 우린 ‘관계’라는 측면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간다. 관계는 다양하다. 친구, 부부, 부모, 직장상사, 동료직원, 부하직원, 시댁, 친정, 자식까지…. 그렇게 다양한 관계는 가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인데…. 그렇게 혼자가 되면 고독하고 슬픈 우리인데,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내 직업 중 하나는 강사다. ‘강사’는 관계에서 ‘고객’이 추가된다. 고객은 다른 관계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같은 커리큘럼도 어떤 사람에게는 호평을 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혹평을 받는다. 특히, 대중에게 낯선 주제일 때는 호불호가 더욱 심해진다. 나의 ‘감정’에 대한 강의 커리큘럼에는 명상이나 신문지 찢기, 난타도 있다.


낯설다.


분노가 나쁜 감정으로 인식되는 문화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렇게 처음 본 이들과 나는 신문지를 찢고 명상을 한다.


그날은 내 생애 최악의 강의였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출국한 국내인이 외국에서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회사의 사원으로‚ 대부분 영어와 한국어 혹은 그 외의 외국어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집단이었다. 강사에게 무언가 배울 수 있겠다는 태도는 처음부터 아니었다.

‘이들과 명상을 잘 마칠 수 있을까?’

명상을 시작하자, 우려했던 대로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피식피식 하던 웃음이 옆 사람에게 번지고, 또 옆 사람에게 번진다. 결국, 박장대소에 이르렀다.


난감하다.


“웃지 않습니다. 명상에 집중합니다. ”

수없이 강의를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당황스럽다. 웃지 않는다는 내 말은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강사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날 난 그들의 마음에 명상의 촛불을 켜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홀로

내 마음의 촛불을

켜본다.







어린 시절의 나


마당에 큰 돗자리가 깔린다.


엄마는 그 위에 밥상을 펼친다. 이제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일곱 살의 나는 네모가 큰 공책에 연필로 꾹꾹 뭔가를 눌러 적기 시작한다. 숫자였던가? 한글이었던가? 열심히 꾹꾹 눌러 적는다. 어느 정도 적던 나는 벌러덩 돗자리에 누워버린다. 햇살이 눈부시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신발장 아래 구석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개미가 기어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길기도 하다. 다시 한 마리, 두 마리….

어라! 한 녀석이 무언가를 물고 간다.


과자인가? 덩이가 크고 맛나 보인다. 길게 늘어선 행렬 사이로 큰 과자 덩이를 이고 가는 개미가 도드라져 보인다. 그 개미가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드디어 개미굴로 들어간다.

다시 개미의 행렬은 도드라져 보이는 녀석 없이 평범해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하염없이 세어본다. 하염없이 쳐다본다. 신기하다. 재미있다. 그들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흔인 나도 일곱 살의 내 옆에 누워본다.


개미 줄을 함께 바라본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하염없이 세어본다. 이번에는 쌀 알갱이를 든 녀석 한 마리가 힘겹게 대열을 걷고 있다. 쌀 알갱이는 개미 크기의 열 배는 되어 보인다. 쌀 알갱이를 든 녀석이 대열에서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드디어 개미굴로 들어간다.


하염없이 개미 대열을 바라보고 있던 마흔의 나는 가슴에 손을 대어본다.


불쾌하고 기분 나쁘던 감정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흥분되고 격분되었던 감정은 가라앉았다. 개미를 다시 바라보다 일곱 살의 나도 지그시 바라본다. 마흔 살의 나의 감정이 일곱 살만 하게 줄어들었나? 웃기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고 성이 나는가….


일어난 일에 대한 나의 감정을 내려놓아 본다.


한번 웃기 시작하면, 웃음을 참기 힘들지 않던가! 그 들이 어찌 나를 놀려먹자고 작정했겠나?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내려놓는다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내려놓인 다. 피식 웃어본다.





개미가 신기하던 그때를 떠올린다.

더듬이가 신기했던가?

기어가는 것이 신기했던가?

모든 것이 신기하던 그 시절은

언제 지나가 버렸나?





자기자비의 도움을 받다


자기자비는 “부정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수용능력”이라고 정의한다(Neff, 2003). 부정적 상황에서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지레짐작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 힘들다면, 나에게 ‘자기자비’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 글은 신간도서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 위로법)>에서 발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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