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놀고 싶지

딸에게 남기는 부자의 태도(1)

by 사투리감별사

이번 여행은 순전히 너를 위한 거야. 방학 내내 학원에, 과외에, 숙제에 치이는 네가 안쓰럽고 기특해서 호텔을 예약했어. 비수기라서 관광지도 덜 붐비고 숙박비도 저렴한데 마침 회사 복지 포인트도 꽉 채워주더라. 사흘간 만이라도 책을 놓고 좀 쉬라고 아빠도 휴가를 냈다.


우리가 지금 아니면 못 하는 것들이 있어. 간식 먹고 수다 떨기, 러시아산 대게 먹기, 애국가에 나오는 기묘한 바위 보기, 수억 년 됐다는 동굴 가보기. 네가 성인이 돼도 기억하면 좋겠고, 나중에 네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면 더 좋은 것들이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너희 모녀는 하루 더 있고 싶다며 바다를 연신 찍더라. 나도 같은 마음이긴 한데 꼰대 같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냥 아침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어지는데. 그럼 그 시간을 채우려고 뭔가를 하게 되는데. 그럼 느슨하게 하루 더 있는 것보다 나을 텐데.'


잔소리를 하고 싶었다.

' 이틀 내내 11시 너머 일어나니까 하루가 짧지. 가뜩이나 해도 짧은 산촌에 왔는데 말이야. 이렇게 하면 하루 더 머물러 봤자 여전히 아쉬울걸?'


너희 모녀가 듣기 싫어할게 뻔해서 말은 안 했다.

여행까지 와서 잔소리는 아니지.


아빠는 여행 갈 때 일정표 짜는 게 재미있다. 보통 2시간 단위로 짜는데 미리 짜놓으면 여행지에서 뭐 할지 뭐 먹을지 고민 안 해도 돼서 좋더라.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성취감도 들고.


이런 습성이 생긴 건 대학 신입생 때 영향이 커. 나는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입학했잖아. 그런데 입학 후에 갑자기 풀어져서 그런지 너무나 대책 없이 살았거든.


보통 하루가 이랬어. 아침에 12시쯤 일어나. 기숙사 매점에서 김밥 한 줄에 왕뚜껑 하나로 아점을 때워. 자판기 커피 뽑아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등교 시작. ㅇㅇ역에서 강의실까지는 일직선 오르막인데 중앙도서관을 지날 때쯤이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 오전 수업은 언감생심 수강 불가고, 오후 수업도 항상 지각. 아빠 별명이 '다 끝났어요?' 였단다. 벌써 수업 끝났냐고 물어대서. 저녁에는 술 마시러 가거나 데이트.


저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어. 입대 전까지 3학기 내내 저랬어. 갑자기 생긴 자유를 허랑방탕하게 쓴 거야.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캠퍼스 낭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몸도 계속 처지고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를 않아. 급기야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무기력해지더라. 두 학기를 연속으로 학사 경고받아서 자칫하면 제적까지 당할 뻔했다.


그 생활도 입대하면서 끝났어. 26개월간 아빠는 살아났어. 기사회생이었지. 이후에 취업하고 가정 꾸리니까 사람이 더 변하더라. 해가 갈수록 시간이 더 소중해지고.


너도 하루를 알차게 보내봐. 벌써 12시 다 됐는데 이제는 좀 일어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