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비좁아

딸에게 남기는 부자의 태도(4)

by 사투리감별사

우리 집 거실은 참 좁다. 한 명이 지나가면 다른 한 명은 비켜서있어야 하지. 안방에서 현관까지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다. 그래도 한눈에 세간살이가 다 보여서 물건 찾기는 참 쉽다.


어제는 1월 관리비 고시서가 나왔다. 누가 보면 우리가 대형평수에 사는 줄 알겠더라. 너 유치원생일 때 살던 주상복합 관리비와 맞먹는 수준이다. 입주민들 단체로 뿔나서 관리소장 면담 하겠다고 난리다. 하루하루가 아주 스트레스야.


관리소장은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보양재 (이사용 종이박스)를 입주율이 90%가 넘을 때까지 안 떼겠단다. 그럼 내년 가을에 이 집을 떠날 때까지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겼다.


사람에게 공간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뗄 수 없는 관계야. 어떤 사람이 지금 어느 공간에 머물고 있나를 보면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거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사람과 게임방에서 담배 물고 침 뱉는 사람은 교양 수준과 심리 상태가 완전히 달라. 또 같은 직장에서도 옆사람과 나란히 앉아서 일하는 사람과 밀폐된 자기 방에서 회의 주재하는 사람은 지위와 책임이 다르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야.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엄마와 책상에서 공부 봐주는 엄마는 다른 사람에 가까워. 주방에 서 있을 때는 노동자의 모습이고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교육자의 모습이야. 둘 다 중요한 역할이지만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더 나아가서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그 공간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보면 그 사람의 현재를 알 수 있어.


만약 네 방문을 열었을 때 침대에는 이불이 팽개쳐있고, 바닥에는 휴지가 나뒹굴고, 책상에는 화장품, 드라이기, 옷가지, 책이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다면 너의 마음 상태가 딱 그런 거야.


반대로 이불은 반듯하게 펴져 있고, 쓰레기통은 비워 있고, 책과 공책은 가지런히 놓여있고, 아이브 포카와 앨범이 한 곳에 정리돼 있으면 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


네 방이 많이 좁아져서 생활하기 불편한 걸 아빠도 잘 알아. 책장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 네 방에 있던 걸 거실로 뺐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좁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우리 딸이 참 고맙고 대견해.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좁은 공간에 살아 보는 게 앞으로의 네 삶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중에 또 좁은 집에 살게 되거든.


네가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원룸에서 자취를 할 수도 있어. 신혼 생활은 작은 평수에서 시작할 테고, 나중에 작은 평수라도 입지가 좋은 아파트를 선택할 수도 있어.


또는 아파트를 매도한 후에 입주일자를 맞추기 위해 작은 집에 잠시 머물다가 들어갈 수도 있고. 외국에서 유학을 하거나 이민을 갈 수도 있겠네. 혹시 렌트비 비싼 도시에 살면 큰 평수는 힘들 테고.


지난 설에 네 할머니 댁에 갔다가 30평이 참 넓구나 하면서 깜짝 놀랐다. 우리도 내년에 이사 갈 아파트는 할머니댁만큼은 넓잖아. 네 방에 책장도 다시 들어가고. 거실 한쪽에는 딱 TV와 화분만 놓아도 되겠다.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네가 언젠가 살게 될 작은 집에 미리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해. '내가 중학생 때 OO동 좁은 집에도 살아봤는데 여기라고 못 살겠어? 아자아자!'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