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만 다닌 이야기 #2

딸에게 남기는 부자의 태도(6)

by 사투리감별사

(전편에 이어)


신혼집은 ㅇㅇ구에 있는 아파트였다. 내 짐은 책상과 옷가지가 전부였고, 네 엄마가 가구랑 가전제품을 혼수로 해왔다. 혼수 중에 가장 마음에 든 건 새 이불과 새 베개였다. 침구에서 그런 산뜻한 향기가 나는 줄은 몰랐다. 돌이켜보면 혼자 산 4년 동안 이불을 세탁한 적이 없었다. 신혼은 폭신폭신한 느낌이라 좋았다.


바로 옆에서는 아파트 신축 공사를 했다. 공사장에서 소음이 난다고 주민들이 연일 시위를 했다. 시위 참석은 의무 사항이었고 우리도 강아지랑 셋이서 피켓을 몇 번 들었다. 몇 달 후에 참석자들에게 보상금과 기념품을 나눠줬다. 보상금은 백만 원쯤 됐다. 큰돈이었다. 세입자에게도 보상을 해주는 것이 신기했다.


2002년 6월. 아파트 광장은 월드컵 응원으로 뜨거웠다. 그 해는 무척 더웠는데 그 집은 특히 더 했다. 복도식이라서 바람이 잘 안 통한다고 했다. 복도식, 계단식이란 용어도 그때 배웠다. 에어컨을 켜놓고 자면 되는데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어컨은 전기요금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네 엄마가 답답해했다.


이사를 갔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ㅇㅇ구 아파트였다. 네 엄마랑 데이트할 때 컵라면 먹으면서 봤던 그 아파트였다. 야경이 예뻐 보였다. 대출을 많이 받았다. 원래 집 살 때는 다들 그렇게 대출받아서 사는 거라고 했다. 밤에 잠을 못 잤다. 내 연봉의 몇 배냐. 이걸 어떻게 갚지?


한강 뷰는 좋은데 강바람이 무척 차가웠다. 거실 확장을 해놨더니 더 그랬다. 투 베이라서 햇빛이 덜 들어온다고 했다. 투 베이, 쓰리 베이도 그때 배웠다. 이 집에서는 금요일 밤 11시가 되면 강변도로에서 굉음이 들렸다. 자동차 레이서들이 정모(정기모임)를 하는 모양이었다. 임진각 방향으로 쉴 새 없이 속도를 냈다.


또 가끔은 동 전체가 흔들렸다. 이번에는 트럭이 문제였다. 강변도로에 큰 트럭이 지나가면 쿠궁거리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진동을 했다. 아파트 커뮤니티 사이트에 문의를 해도 이상하게 그 질문에만 아무도 답을 달지 않았다. 이미 다들 알고 있었구나.


5년 반이 지났다. 이사를 결심했다. 추위 때문도, 진동 때문도 아니었다. 같은 직장 다니는 꼴 보기 싫은 인물이 근처에 살았다. 출퇴근할 때마다 마주쳤다. 버스도 같이 타야 했다. 동네에 정이 떨어져서 매물로 내놨다.


몇 달째 연락이 없다가 멀리 다른 동네 중개업소에서 연락이 왔다. 조급한 마음에 여기라도 내놔보자 하고 들어갔던 중개업소였다. 매수인은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살 때 가격보다 더 높여서 팔았다. 딱 대출액만큼 더 높였다. 어? 그럼 대출을 다 갚은 셈이네!


ㅇㅇ구 아파트를 계약했다. 세입자의 전세기간이 1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다른 집에서 지내야 했다. 오피스텔도 알아보고 단기 임대 주택도 알아봤는데 마땅치 않았다. 마침 그때 oo 교회 권사님께서 딸이 살던 빈 집이 있다고 하셨다. 딸이 유학 중인데 귀국은 아직 멀었고 낡은 재건축 아파트라서 세입자 받기도 애매한 상황이라고 하셨다.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심지어 도배까지 새로 해주셨다. 권사님은 우리 부부만큼이나 기뻐하셨다.


70년대에 지은 이 아파트에는 보일러가 없었다. 대신 방과 거실에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라디에이터는 기숙사에서도 보던 거라서 익숙하긴 했는데 밤마다 딱! 딱! 물 흐르는 소리는 여전히 거슬렸다. 수도꼭지를 틀면 녹물이 나왔고, 천장에는 검은색 곰팡이가 서서히 번져갔다. 1층 주차장에서는 쥐와 마주치기 일쑤였다. 입주민들 참 살기 힘들겠다 싶었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1년을 보냈다.


이 집은 이후에 '반포 oooo' 란 이름으로 재건축됐다. 요즘도 한강변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부자들은 부자라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베푸니까 부자가 된 것임을 배운 1년이었다.


이사한 아파트는 지하주차장까지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었다. 차에서 내려도 비를 맞을 일이 없었다. 정남향이라서 햇빛도 잘 들었다. 내 방도 만들었다. 책상과 책장을 새로 세팅했더니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집은 층간소음이 너무 심했다. 윗집 발망치 소리, 싸우는 소리, TV 소리가 다 들렸다. 경비실에 얘기도 해보고 올라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건물 자체가 문제였다. 2000년대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유독 그렇단다. 공사비를 줄이려고 층간 소음에 신경을 안 썼단다. 법률 규제도 느슨했고. 관리사무소도 지자체도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동네 부동산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앞 동 30평대가 경매로 나왔는데 응찰해 보라는 권유였다. 그때도 네 엄마는 판단력이 참 좋았다. 바로 잡아서 일사천리로 진행하더라. 우리 부부는 경매를 몰랐다. 그래도 평소에 부동산 박사장님께 인사는 잘했다. 경매는 사장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셨다.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더니 20평대를 팔고 30평대를 등기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네가 태어났다. 참 어렵게도 엄마아빠에게 왔지. 안방에는 아기 침대를 놓고 거실에는 매트를 깔았다. 장난감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어도 생활하기에 넉넉했다. 도우미 여사님과 네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시더라. 아빠는 그때도 집에서는 3인칭 관찰자였다. 별로 힘든 기억이 없네. 층간소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공간이 넓어지니 살만 했다.


그런데 아파트 시장이 침체기였다. 정부가 서울에 공급을 늘린 영향이다. 이어서 대통령이 바뀌었는데도 서울과 인근에 계속 공급을 늘렸다.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대출 이자 갚느라 팍팍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매일 떨어진다는 뉴스만 보니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싶었다. 세간에는 '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 '부동산은 끝났다'라는 살벌한 제목의 책들이 회자됐다. 가까운 직장 동료는 대출을 청산하고 전세 아파트로 들어갔다고 했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며 적극 추천했다.


또 우리 딸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컸으면 했다. 이왕이면 놀이기구도 다양하고 안전한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퇴근길에 중개업소에 집을 내놨다. 엄마와는 한마디 상의도 안 했다.


집은 금방 팔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워낙 집을 깨끗하게 쓰니까 누가 봐도 호감이 갔을 것이다. 매매 계약서를 쓰는 날까지 박사장님은 빨리 다른 집을 매매로 잡으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건성으로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동산은 끝났다는데... 요?'


그렇게 다시 무주택자가 됐다. 지긋지긋한 대출이 없어져서 홀가분했다. 차도 새로 바꿨다. 트렁크에는 골프백을 싣고 다녔다. 펀드에도 가입했다. 안정적으로 돈을 모을 수 있단다. 무척 신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 후... 집값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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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다. '작은 공간 넓게 쓰는 법'은 좀 더 이따 얘기하자. 우리가 이사를 참 많이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