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할아버지
우리 앞 집에 백인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사셨다. 긴 겨울을 보내고 날씨 좋아지는 오월이 되면 마당에 나와 할아버지는 잔디를 깎고 할머니는 나무 손질을 하셨다. 두 분이 마당에서 도란도란 이것저것 손보고 돌보는 것을 보면 마치 한국에 있는 나의 부모님을 뵙는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지만 차고 문을 열고 나갈 때 보게 되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바람이 무지 불고 비가 엄청 내리던 날, 뉴저지에 폭풍 경보가 내리고 비상식량을 사다 놓으라고 방송이 나오던 밤 그 집 앞에 있던 큰 나무가 쓰러졌다. 그 큰 키가 넘어지면서 우리 집 쪽 전기 줄을 휘감는 바람에 이쪽이 정전사태가 났다. 전기고 인터넷이고 다 끊겼지만 그 보다 난방이 안되어 엄청 추웠다. 초 겨울로 들어서던 길목이었는데 벽난로를 켜고 그 앞에서 온 가족이 모여 잤는데 얼마나 춥던지 다음날은 모두 찜질방으로 가서 자자고 입을 모았다.
이튿날 나가보니 우리 골목을 더울 땐 그늘이 되어주고 추울 땐 방어막이 되어 주던 그 큰 나무가 장엄한 위용은 간데없이 땅바닥에 어이없게 누워 있었다. 얼마나 큰지 나무 갈아대는 차가 몇 대나 와서 자르고 갈고 해서 길을 내었다. 그 이후로 골목은 든든한 성벽이 사라진 것처럼 초라해졌다. 할아버지는 그 나무가 가고 난 자리에 작은 묘목을 심으셨다.
그러던 지난겨울 이번에는 앰뷸런스가 그 집 앞에 서 있는 걸 보았다. 미국은 앰뷸런스가 혼자 오는 법이 없다. 항상 아이들 장난감처럼 불빛이 요란스러운 경찰차와 함께 하는데 그날도 경찰차의 불빛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카바레 광고판처럼 요란을 떨어 창 밖을 내다보다 급한 환자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밤중에 무슨 일일까 걱정스러웠지만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이 그저 차의 불빛만 현란했다.
그날 이후 할머니를 볼 수가 없었다. 옆 집 이웃의 말에 의하면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남겨진 할아버지는 어찌 된 일인지 그때부터 목발에 의지해서 간신히 걸음만 떼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아주 불편해 보였고 그래서 도우미 같은 흑인 아줌마와 가끔 골목길만 산책하셨다.
크리스마스 때였다. 우리 골목은 이웃집 대문에 서로 과자 봉지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걸어 놓는데 내가 마침 우리 골목에 봉지들을 나누고 온 후였다. 할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 났다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발에 의지해서 서 계신 할아버지가 불편해 보여서 들어오시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사양 않고 바로 들어왔는데 막상 현관에 올라서니 무척 키가 커서 놀랐다.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기도 하나 없어서 뭔가 화가 났나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 과자 선물이 고마와서 인사하러 왔다고 하셨다. 그 집은 생전 자식이 오는 법도 없고 방문하는 차도 없고 항상 두 분이 사셨는데 이젠 또 혼자가 되셨으니 외롭고 가족이 그리운 할아버지의 마음이 짐작되어 안쓰러웠다. 나는 부모님이 생각나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엊그제 그 집에서 낡은 소파를 길에 내놓았다. 재활용 픽업이 있는 날도 아닌데 내놓아서 이틀인가를 길가에 그냥 길게 누운 채 소파가 있었다. 그러다 다음날 그 소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승용차가 서너 대 늘어서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있었고 잔디를 깎는 아저씨가 기계를 타고 일하고 있었다. 서너 살 된 여자아이 손을 잡고 들어가는 할머니,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이 두세명 들락날락하며 짐을 차에 싣고 있었다.
정작 주인인 할아버지는 어디도 안 계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차마 그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물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나쁜 소식을 들을까 두려웠다. 그냥 볕 좋은 양로원으로 옮기셨으려니 두 분이 편히 돌봄을 받으시려니 그래서 짐을 꾸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 후로 새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 왔다.
그 집 어디에도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예전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세월은 시치미를 떼고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 내 기억 속에서만 그분들이 살던 모습이 존재할 뿐이다.
나무를 돌보며 마당을 정리하던 두 분의 모습, 초록빛 오후의 따스한 봄날, 평화롭고 정겨운 모습이 무척 그립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고 삶이지만 지나고 보면 그 순간이 빛나는 보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인간이며 삶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