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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May 24. 2020

해프닝

걸음을 걷기 위해 발을 내딛는데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른발을 먼저 내디디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원래 나는 오른발로 먼저 걷기 시작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나는 평생 왼발을 먼저 내디디며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로써 오른발로 걸음을 내딛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 나를 엄습해왔다. 나는 나의 걸음을 확신할 수 없었고 그 부정된 확신은 나의 존재에 대한 불확신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내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았다면 누구나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갑자기 거리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걸음을 내딛다 말고 가만히 서서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회 통념적인 사고로 생각했을 때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길을 지나가다 이런 내 모습을 보았을 때 큰 소리로 소리 내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놈이 엄한 데에서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하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거리에서 망부석이 된 그 시간에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 시간이 그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시간 그 거리에서 가만히 멈출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다시 나의 내면으로 돌아와서 나는 아직도 내가 과연 오른발로 걸음을 시작하는 게 맞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방금 걸음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걸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과 1분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걸음을 시작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치 내가 걷는다는 행위의 시작은 좌우 구분이 없이 시작된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다리 부분이 뭉개져서 떠오를 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걸음을 뗀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내 기억 속에서는 다리 부분만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채 기억날 것이었다.

사실 어느 발로부터 걸음이 시작되는 자기가 뭐 그리 중요한지 지금의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것이 마치 나의 전부인 마냥 나를 지배한 것이었다. 오른발인가 아니면 왼발인가.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였다. 네발로 걷는 다른 동물이나 발이 너무 많아 그 숫자가 몇 개인지 셀 수조차 없는 지네가 아니었다. 오른쪽이 아니라면 답은 왼쪽이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더 이상 나에게는 오른발 혹은 왼발이라는 신체의 일부로서의 순서가 중요하지 않아 졌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순서였다. 점점 추상화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붕괴했다.

나는 더 이상 방금도 내가 어느 쪽 발로 걸음을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앞에서 내가 오른발로서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그 걸음을 뗀 순간 신체가 멈추고 오직 머릿속에서 내가 어느 발로 걸음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지옥에 갇혔는지 말했다. 하지만 사고의 감옥에 갇힌 나에게 그런 과거의 사실은 말끔히 날아간 상태였다. 물론 두 눈을 부릅뜨고 내 다리를 보면 오른발이 분명 앞서 있는 것을 보고 아 내가 이번에는 오른발로 걸음을 시작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주 사소한 것. 내가 어느 발로부터 걸음은 시작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사고로부터 몸은 멈추어버렸고 의식은 끝없는 질곡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어디선가 본모습 같다. 물론 인간이 걷는다는 행위와 그 모습은 아주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 본모습의 꼴을 나는 하고 있다. 그렇다 자코메티. 빼빼 마르고 흉측하게도 보이는 자코메티의 것들. 마치 자코메티의 작품처럼 나는 서 있었지만 현실의 인간이 그렇게 서 있는 것은 매우 우스운 꼴이다. 인간 존재의 고독함과 꿋꿋하게 걸어가는 실존적 의미를 품은 자코메티의 걷는 남자와 다르게 실제 세계에서 한 남자가 걷다가 멈춰 서있는 꼴은 제법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어쩌면 서 있고 의식이 나를 지배한 그 순간은 몇 초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의 시간과 의식 속의 시간은 다른 법이다. 아무리 의식 속에서 1년 혹은 10년의 과도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더라도 이상하게 현실에서의 시간은 몇 분도 되지 않은 채 시계는 천천히 그 바늘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거리에서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서 있던 시간도 사실 알고 보면 몇 초 가량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지옥을 다녀오고 끝에 없는 질곡에서 헤맨 영겁 같았던 시간이 사실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고의 회오리를 멈추고 나를 끄집어내 구원한 것 역시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 보잘것없이 걸음을 멈춘 채 서 있는 나의 앞으로 떨어지는 꽃잎. 그렇다. 지금은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초점을 잃은 채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나는 떨어지는 꽃잎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꽃잎이 나의 시선을 모조리 앗아갔다. 나의 초점은 어느새 제자리를 찾고 떨어지는 꽃잎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떤 꽃의 꽃잎인지 알 수 없다. 흰색인가 아니다 붉은색이다 혹은 노란색일지도 모른다. 무슨 색인지 무슨 꽃의 부분이었는지 어떤 모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떨어져 바람에 휘청이며 떨어지는 꽃잎이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전부다. 보이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보이는 것을 넘어 나를 지배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이 전부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시선이 떨어지는 꽃잎을 따라 움직이자 온몸을 지배했던 마비가 풀렸다. 피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에서 출발한 피가 손끝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가고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공평하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손끝과 발끝에 도달했던 피가 다시금 그 역동성으로 심장에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내가 존재함을 느꼈다. 그렇다 결국 내가 오른쪽 다리를 먼저 내딛거나 왼쪽 다리를 먼저 내디디며 걸음을 시작하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이 땅에 발을 내디디고 서 있으며 숨을 쉬고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단순히 살아 숨 쉬는 생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줘 주는 저 작은 꽃잎이 이 세상의 전부이다.

나는 저 꽃잎을 흰색, 붉은색, 노란색 오묘하게 색들이 섞여 있어 무슨 색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바람에 휘날려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며 움직이고 있음으로 나는 저 꽃잎의 모양이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꽃나무가 흐드러져 있고 각기 다른 존재이므로 나는 저 꽃잎이 어떤 나무에서 그중 어떤 가지에서 난 어떤 꽃에서 떨어져 나와 저리도 혼자 배회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저 꽃잎이라는 작은 존재가 존재하며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으며 나에게 그것이 전부이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에게서 나온 존재인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존재하며 지금 내가 저 꽃잎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그 명확한 사실이 바보같이 서 있던 나를 일깨웠다.

마치 데카르트의 선언과 같은 순간의 기적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나도 나의 사유를 통해 나의 존재를 깨달은 것인가. 아니다. 서 있는 동안 나는 사유와도 같은 신성한 행위를 하지 못했다. 나의 사고는 정지했으며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기적을 선사한 생각과도 같이 나에게 기적을 선사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에게 기적을 선사한 것은 떨어지는 보잘것없는 저 작은 꽃잎이다. 나는 “꽃잎이 떨어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칠 것인가.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외부의 현상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현상 너머의 그 무언가가 나를 찾은 것이다.

데카르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그 순간 나는 서 있었다. 보기에는 꽃잎의 순간을 포착하기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마비가 풀리고 내면에 사고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딘 채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떨어지던 꽃잎이 저 멀리 사라지며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시선을 계속 꽃잎에 고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계속 이어져 어느새 바닥으로 향했는데 그때 앞으로 내디뎌진 나의 오른발이 보인 것이다. 그렇다 결국 나는 오른발을 내디디며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웃었다. 소리 없이 웃었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웃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내가 왜 웃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간단한 현실을 멍청하게도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가여워서 웃었을 것이다. 아니면 드디어 알 수 없었던 것을 알았다는 것에 기뻐서 웃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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