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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May 24. 2020

感情所困無心戀愛世

17년 전 한 남자가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의 마음은 닳고 닳아 지쳐있었으며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가 어떤 배우였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를 알아가는데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늘까지 그가 마지막에 남긴 한마디의 말을 잊을 수 없어 그 한 마디를 그대로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 간직하게 되었다.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정의하라 한다면 100명의 사람들은 100가지의 정의를 내린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누구 것과도 같지 않다. 하지만 사랑이 마음을 준다는 것임을 우리는 동의한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하며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그래서 사랑은 너무도 잔인하게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나의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의 사랑과 상대의 사랑이 다르면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저 대상이 과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같지 않기에 알 수 없지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추정을 안는다. 추정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증명하려 한다.


사랑의 기간이란 서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기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이렇게 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너를 사랑해주는데 과연 너는 나를 얼마큼 사랑하고 나를 어떻게 사랑해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이 확인하려 한다. 다행히도 내가 바라는 만큼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정도와 방식이 충족된다면 내가 상대에게 준 마음만큼의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내가 상대에게 준 마음은 점점 닳아가고 지쳐간다. 그리고 결국 더 이상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사랑의 속성에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대상에게 나의 관심, 애정, 연민, 우려 심지어 분노와 슬픔까지를 담아 마음을 준다. 상대에게 준 마음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어디까지 발현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상대에게 모든 마음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나에게서 출발한 마음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마음이 나로부터 떠나게 되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마음을 받는 사람은 상대가 나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마음만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 마음을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마음을 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마음을 자신에게서 떼내어 다시 받을 거란 기약 없이 상대에게 주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준 사람은 마음을 잃은 사람이 된다. 마음을 주는 사람에게 정도란 없다. 한번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어느새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만큼 일정 부분만 줄 수 없게 된다. 한번 주기 시작한 마음은 관성과 경로를 가져 방향을 따라 속도와 크기는 점점 커진다. 한번 주기 시작한 마음은 닳고 닳아 그 끝이 보일 때까지 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마다 마음의 정도가 다르고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순간에 모든 마음에 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평생에 걸쳐 모든 마음을 줄 수 있다. 


마음을 준 사람은 마음의 공백을 스스로 채울 수 있다. 사람마다 정해진 속도와 주기로 비어버린 마음은 다시금 차오른다. 마음이란 상대방을 향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 존재를 버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차오르는 마음뿐만 아니라 내가 마음을 준 상대방으로부터 마음을 받게 되면 그 마음은 나에게로 와 새로운 나의 마음이 된다. 성질이 다른 완전한 타인의 마음은 나에게로 들어와 나의 마음과 섞이게 되고 내 안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사람을 바꾸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주고받고 새로운 마음이 탄생하게 되는 사랑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이다.


나에게서 떠난 마음은 나 스스로로 인해 차오르기도 하고 타인으로 인해 차오르기도 한다. 앞에서는 마음을 준 사람으로부터 받은 마음을 통해 마음이 새로운 형태로 차오른다고 말했지만 사실 사랑이란 쌍방향적인 것이 필수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갑작스럽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많은 경우 마음을 받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을 받더라도 나의 마음을 새로운 것으로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금 마음이 차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것이 언제나 기대와 예상에 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차오르는 경로에 이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할 것 같은 사랑에는 언제나 비극이 존재한다. 비극 없는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와 같지 않고 상대의 마음이 나의 마음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비극을 언제나 등장시킨다. 수많은 형태의 비극이 존재하지만 마음의 정도에 대한 비극은 나의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양과 속도보다 상대에게 주는 마음의 양이 많고 속도가 빠를 때 시작된다. 


나의 마음이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누군가에게 줄 때 마음은 닳아간다. 닳은 만큼 다시 회복되고 새롭게 차오른다면 마음을 주는 것에 기뻐 더 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마음을 주는 것은 점점 끝을 향해간다. 마음을 주고 싶지만 줄 수 있는 마음이 없어 줄 수 없을 때 마음은 피곤해진다. 마음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을 줄 수 없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든 마음을 주고 싶어 스스로를 쥐어짜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차오르기 무섭게 상대방에게 주기 위해 달려간다. 하지만 점점 그러한 발버둥은 마음을 주는 사람 자체가 지쳐간다는 증거다. 마음은 이미 닳아 없고 이젠 마음을 담고 있는 존재 자체가 닳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의 마모의 끝에는 언제나 사랑의 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랑이 끝나는 것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랑은 끝남으로써 더 이상의 할 말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떠올려 본다.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물론 떠난 그가 어떤 심정으로 한 구절을 남기고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을 등진 그 순간에 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떠난 그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 한마디에는 그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너무도 사랑했고 마음을 주었지만 더 이상 그에게는 세상에게 줄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난 마음을 긁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본인 존재 자체를 닳게 하면서까지 사랑했을 거라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다는 피로감에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이길 존재도 닳아서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의 할 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물론 이건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그의 마지막에 내 모습을 비춰놓고는 그의 이야기인 것처럼 떠들어 댄 걸지도 모른다.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나는 너무도 아름답고 슬펐던 4월의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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