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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May 24. 2020

실망시키는 것에 대하여

1

한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 카페 안을 뒤돌아 본다. 그녀의 몸은 문 밖으로 향해 있고 오직 그녀의 고개만 뒤로 향해있다. 카페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 남자는 아무 표정 없이 나가기 위해 문을 열고 서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에서 어떤 감정을 읽을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는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를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고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완전히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문을 지탱하고 있는 왼손을 놓아버리자 카페의 문이 닫혔다. 문은 시끄럽지 않게 닫혔다. 그녀는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카페에서 멀어져 갔다. 카페에 앉아있는 그는 여자가 완전히 떠나버린 후에도 계속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이 없는 눈동자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에게서 생명력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녀가 떠남으로써 그 자리에 앉아버린 채 죽어버렸다.


2

그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4시간 만에 그녀에게서 들은 말은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는 준비한 많은 말들을 차마 내뱉기도 전에 그녀로부터 “실망”이란 단어를 들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실망이란 단어는 그를 죽여버렸고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실망시킨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사람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마지막까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마저 그가 저지른 실망의 연장선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차마 그녀의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 나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다.’는 생각이 순간 그를 덮쳤고 그는 죽어버린 마음을 안고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떠나고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마침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만이 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시간 그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살려낼 수 없었다. 


3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죽은 사람에게 남겨진 것은 영원뿐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로 얼마나 지났는지는 의미를 잃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 그에게 죽음을 선고한 그녀의 “실망”은 그를 영원의 영역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결코 영원한 죽음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헤어 나올 수 없을뿐더러 그는 영원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갇혀버린 죽음에선 그는 그녀를 영원토록 붙잡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그를 떠나버렸지만 그녀가 선사한 죽음의 영원 속에는 그녀가 존재한다. 그는 그렇게라도 그녀의 존재를 붙잡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생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존재해 생을 느낄 수 있는 죽음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가 그녀를 기다린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할 말을 수 없이 정리하고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억눌렀던 시간만큼 그녀가 그를 죽음으로 던져버린 시간이 새롭게 또 흘러갔다. 


4

죽음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뒤척이며 생을 느끼고자 매달리는 그를 깨운 것은 당연히 카페의 주인이었다. 카페의 주인은 그에게로 다가와 “이제 곧 마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천천히 카페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생명이 돌아왔다. 그는 “죄송합니다”는 말을 주인에게 건넸다. 그는 천천히 테이블 위의 컵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것처럼 문 앞으로 가서 왼손으로 문을 열고 멈춰 서서 뒤돌아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실망”이란 단어를 그에게 선사한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실망”이란 단어를 듣고 죽음의 영원으로 빠져버린 자신의 모습도 없었다. 그저 온도가 없는 차가운 테이블과 의자 두 개만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손을 잃은 문은 천천히 소리 없이 닫혔다. 그는 주 머리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자 어지러웠다. 담배를 피워서 어지러운 건지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일어서서 어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심장 박동이 귀 밑에서 느껴졌다. 몸에 천천히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떴다. 담배가 필터 앞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 모금밖에 피지 못한 담배를 버려야 했다. 사뭇 아쉬워 그는 무리해 서서 다 타버린 담배를 한번 더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다 타버려서 더 이상 필 수 없는 담배를 길바닥에 버렸다. 담배 냄새가 입 안에 남자 그는 텁텁한 입을 씻고 싶었다. 그는 다른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어 걸음을 옮겼다. 


5

그는 그녀가 내뱉은 “실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무엇이 그녀를 실망케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실망시키고자 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혹시라도 그녀를 실망시킬까 두려워 그 자신을 죽이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하게 행동하며 적당한 말을 건넸다. 혹시라도 본연의 그가 다시금 나타날 때면 그는 그녀에게서 잠시 멀어져 본인을 다시 죽이고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행동이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맞춤으로써 그녀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도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실망”에 그렇게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을 계속 죽여갔다. 하지만 그 죽음이 낳은 것은 그녀를 실망시킨 것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죽음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되었던 죽음이 결국엔 그녀를 실망시켰고 마침내 그를 진정으로 죽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진정한 죽음이 그리웠다. 더 이상 그의 곁에는 그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느낄 수 있는 잠시 동안 영원했던 죽음이 그리웠다. 하지만 한번 깨져버린 영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은 폐쇄된 자체에서 영원성을 가질 뿐이지 한번 깨져버리면 영원은 폐쇄의 속성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그녀를 실망시킨 것이 무엇인가를 아무리 생각해봐야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실망했고 떠나버렸다. 이제 와서 실망한 것을 반성해봐야 그녀는 그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죽음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죽여왔던 시간들이 과연 그녀를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끊임없이 죽인 것은 그녀를 위해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자체를 즐겼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만일 그가 죽여온 것들이 진정 그녀를 위한 행위라면 그녀는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죽음으로 유지되어온 시간들을 실망했다는 것은 결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본인을 그렇게 죽여왔던 것이며 지금 그가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자신이 행했던 수많은 죽음이 아닐까.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속이 메스꺼웠다.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죽인 적이 없었다. 그가 그토록 자신을 죽여온 이유는 그녀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온 자신이 역겹고 실망스러웠다. 그는 카페로 가지 않기로 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속아온 자신이 너무도 실망스러워 진정 자신을 죽이고 싶어 졌다. 그는 자신이 죽고 싶은 것인지 자신을 죽이고 싶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투명하게 어두웠다. 빛은 없었지만 어둡지 않았다. 죽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밤하늘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 날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죽음의 그림자마저도 생기지 않는 그런 칠흑 같이 어두운 밤하늘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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