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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Feb 25. 2020

어떤 이야기

1  

비는 그쳤지만 슬픔은 그치지 않았다. 비가 그치면 슬픔에 잠긴 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그 모습을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슬픔은 더욱 깊어졌고 공기방울 조차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나는 가라앉았다. 그녀가 떠나갔다. 아니 내가 그녀를 떠나보낸지도 모른다. 우리가 헤어진 날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비는 영원히 내릴 것 같았다. 하늘에 구멍이 생겼고 구멍이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바다를 흘려보낸 것처럼 많은 비가 내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는 자신 말고는 모든 소리에 장막을 쳐버렸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거리에는 나와 그녀 둘 밖에는 없었다. 우리의 이별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 비극의 무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비운 자리에는 비가 내렸다. 비는 우리 만을 위해 비친 스포트라이트 조명처럼 세상을 까맣게 만들었다. 관객은 없다. 비는 우리의 이별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비를 피해 모두가 숨어버린 거리에 우리는 어느 건물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허름한 건물의 처마 밑에서 나와 그녀는 지금 내리고 있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처마였다. 벽에 바짝 붙지 않으면 이내 머리 위로 비가 떨어졌고 옷이 젖었다. 우린 나란히 서서 아무 말 없이 내리는 빗소리만 들었다. 영원히 내릴 거 같은 비가 멈추길 우린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비가 멈추길 바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도 그럴까, 최소한 나는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이 시간이 영원이 멈추길 바랐는지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차도 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들이 모여 물줄기를 만들었다. 건물의 배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빗물도 있었고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빗물도 있었다. 하늘에서 바로 물줄기가 되어 떨어지는 빗물도 있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배 구수를 향해 흘러가는 물줄기를 쫓았다. 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흔히 보이는 작은 비닐 쓰레기나 담배꽁초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빗물만이 모여 흘러가고 있었다. 저들은 흘러 향하는 곳이 궁금해졌다. 빗물은 흘러 강으로 간다. 강으로 가서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갈 것이다. 거리에서 강으로 그리고 다시 바다로 가는 그 여정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 빗물은 누구 곁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기만 한다. 어느 곳에도 정을 붙일 수 없고 누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냥 바다라는 거대한 혼자가 되기 위해 흐르는 저 빗물이 너무도 서글퍼졌다.  

빗물을 보니 너무 슬퍼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흐르는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누군가에게 머물고 싶은 빗물들이 그녀의 어깨에 힘겹게 앉아있었다. 살짝 물든 그녀의 어깨가 가련해 보였다. 그녀의 어깨에 잠시라도 머무르고 싶은 빗물이 불쌍했다. 그런 빗물에게 작은 어깨를 내어준 그녀도 가여웠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힘껏 안고 싶어 졌다. 하지만 내겐 감히 그녀를 안을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젖은 어깨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가 젖어 그녀의 맨살이 블라우스와 하나가 되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젖어 그녀의 어깨를 멍들게 했다. 하지만 내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니 내 바지에 묻어 송골송골 방울 진 빗방울들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적신 빗방울들이 미워졌다. 내 바지의 빗방물을 보니 그들이 생각나 미워졌다. 눈물이 날 뻔했다. 나는 그들을 매몰차게 털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아프길 바랬다. 물방울들은 바지가 무겁게 감기는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렸다. 그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차도를 흐르는 물줄기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어느새 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바지에 비가 튀었네요.” 나는 대답했다.  

“젖었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뇨.. 그냥… 싫어서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건넸다.   

“어깨가 조금 젖었어요. 감기 안 걸리게 이걸로 닦으세요.”  

그녀는 내가 건넨 손수건을 받았다.  

“고마워요. 근데 왜 손수건을 안 쓰셨어요?” 그녀는 내게 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어요. 근데 끝난 후에야 생각나네요.”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나에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손수건이 있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수건을 쓰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네고 싶었다. 가장 순수한 손수건에 나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쥐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변명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게 보인다. 그녀는 손수건에 무엇이 담겼는지 모를 거다. 그녀가 어깨를 닦고 있는 그 손수건은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것임을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손수건을 나의 단순한 호의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 평범한 손수건으로 단지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낼 뿐이어도 나에겐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내가 한 거짓말을 곰곰이 씹어본다. ‘끝난 후에야 생각났다’는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고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끝나기 전에 생각나면 세상은 조금 완벽해지지 않을까.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 끝나고 난 후에야 생각이 나서 우리는 이토록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인 것은 아닐까. 만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신경 쓴다면 후회는 없을 거고 비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끝난 후에야 생각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이토록 비극적일 테다.   

그녀는 내게 다 쓴 손수건을 곱게 접어서 건넸다.  

“고마워요.”  

나는 그녀가 건넨 손수건을 받았다. 나는 손수건을 한번 더 접어 내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영원히 꺼낼 수 없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집어넣고 싶었다.   

“이 비가 그칠까요?” 그녀는 물었다.  

“글쎄요…” 나는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비는 좀 전보다 약해졌다. 하지만 아직 비는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치지 않길 바란다는 거짓말을 그녀에게 또 할 수 없었다.  

“그러면 기다려야겠네요…” 그녀는 왼쪽 다리를 벽에 기대며 대답했다.   

“아니면… 우산을 쓰고 같이 갈래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이내 나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 맑게 젖어있었다. 비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는 슬픈 것인가. 아니다. 이 비를 부른 것은 그녀의 눈동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바다가 그녀의 눈동자에 감응하여 비가 되어 이 거리에 내리는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리를 둘러싼 이 비를 담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서러워졌다. 계속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나는 녹아서 사라질 거 같았다. 그리고 거리 위를 흐르는 빗물과 함께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의 일부가 되어 바다로 쓸쓸히 흘러가는 내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했다.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우산을 보였다. 우산은 젖어있었다. 우산을 적신 빗물들이 고여 우산과 땅을 잇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에 녹아 가는 내 꼴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슬퍼 보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지금 비가 멈추길 바랬다. 그녀와 있는 게 두려워졌다. 녹아서 바다로 향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비가 멈추길 기도했다.  

비가 그쳤다. 영원토록 내릴 거 같은 비는 너무나 쉽게 그쳤다. 내가 비를 멈추게 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부른 비를 멈춘 건 나 때문이다. 그녀가 하늘에 만든 구멍을 내가 막아 버린 것이다. 내가 메마르게 한 비는 우리의 마지막 마음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하늘에서는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가 가득 메운 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그저 가로수와 처마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서글펐던 빗소리의 공백을 조금씩 채워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도록 세상을 단절시키던 비가 사라지자 그녀와 나만 존재했던 무대도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무정하고 적막한 현실에 덩그러니 던져졌다. 우리는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아담과 이브처럼 모든 걸 잃고 이 세상에 서 있었다.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면 애석하게도 그들에게 놓인 건 시작이지만 우리에겐 영원한 이별이었다. 이따금씩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물웅덩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짧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커튼콜마저도 마친 배우들을 위해 누군가 치는 작은 박수소리 같았다. 막이 내린 극장의 문이 열리듯 다른 쪽에서는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지막이었던 비가 그쳤다. 남은 건 이제 우리의 이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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