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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Dec 07. 2019

하루키는 하루키스럽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하루키의 책은 일종의 가성비가 부족하다. 한번 책을 잡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읽고 말아 버리니 한 권을 책을 사도 반나절이면 다 해치워버리고 만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겠다는 요구에는 어쩌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직전에 읽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는데 보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하루키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이 더 짧게 느껴졌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하루키가 1991년에 쓴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살 땐 몰랐으나 이제 보니 책 표지의 일러스트가 제법 옛 느낌으로 충만하다. 마치 “상실의 시대”를 처음 살 때 느꼈던 삼촌 책장에 놓여있는 먼지가 앉아있는 유행이 지난 책과 같은 느낌이 든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내용을 일일이 말하는 것을 차치하고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분명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책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루키에게는 그 법칙이 예외로 적용된다. 그 이유는 하루키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루키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한 배려이며 하루키를 읽어 본 사람에게는 사족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루키 소설의 내용은 마치 백종원의 "만능 소스"와 같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맛을 보면 이후에 기대가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이야기 하기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많은 부분, 특히 처음 부분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딱히 별 내용은 들어있지 않고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서도 큰 중요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서술과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때론 몇 문단으로 책의 전반부를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매번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한 줄이라고 놓칠까 두려워 꼼꼼히 한 줄 한 줄 읽어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쓴 한 자 한 자를 읽어가는 까닭은 그의 한 줄 한 줄은 중첩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첩되어 쌓아 올린 문장들은 어느새 책 전체를 형성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읽는 이는 그 분위기 속에서 그 책을 읽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쌓아 올린 분위기는 책을 놓지 못하게도 만든다. 정교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를 잃을까 두려워 나는 하루키의 책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게 된다. 하루키가 문장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모습은 영원회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일상 혹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물론 다른 모습을 하고 성질도 다르지만 하루키의 문장 속에서는 똑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똑같은 분위기의 문장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마치 영원회귀 속에서 삶이 반복되듯 하루키 속에서 피상적인 존재가 반복되는 것이다. 게다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마치 진짜 한 인간의 시간이 반영된 듯 그 분위기 역시 나이를 먹어가며 더욱 두터워진다. 책 속의 주인공(하지메)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성숙해가는 주인공을 따라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품 속에 존재하는 분위기는 점점 그 농도가 짙어져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안개와 같이 작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치 호숫가의 물안개처럼 짙게 나의 시야를 방해한다. 하지만 이 방해는 불편한 방해가 아니다. 오히려 작품에 빠져들 수 있도록 나의 퇴로를 차단하여 작품이란 호수로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에 가깝다. 안개가 작품의 몰입을 도와주지만 그 안개 본연의 성질로 인해 나의 시야를 가린다. 그 덕에 나는 뚜렷하게 하루키 작품을 관찰할 수 없다. 약간 뿌옇게 그 세계에 진입할 뿐이다. 하지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지금까지의 하루키 작품들에 비해 그 안개의 농도가 옅다. 아니면 내가 너무 안개의 농도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와의 차이를 느낀 이유는 지금까지 어느 작품보다 장면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비록 미장센 가득한 화면까지는 아닐지라도, 일일연속극 속의 상투적인 화면으로라도 그 장면을 환원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 역시 지극히 하루키스러웠다. 누군가에게 “하루키스럽다”라는 건 자기 복제와 무의미의 향연일 뿐이다. 메타포로 가득한 아니 어쩌면 메타포 그 자체로 존재하는 여인 그리고 그 앞에서 메타포에 휘둘리기도 하고 자신을 잃을 뻔한 하지만 결국엔 자신을 지켜나가는 나이브하고 연약한 남자가 만들어가는 에로틱한 일상과 일탈에서 하루키의 작품은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작품을 반복하여 접하다 보면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역시도 기시감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부분이 이전의 "상실의 시대" 혹은 이후의 많은 작품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분명 존재한다. 이전까지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청춘 혹은 한 세대에만 국한되어 내용이 전개되었다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주인공(하지메)의 나이 듦을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주인공의 변화가 역동적으로 나타나 진다. 또한 주인공의 삶의 많은 부분이 실제 하루키의 삶과 닮아 있어 독자는 주인공이 실제 하루키와 얼마나 가까울지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뚜렷하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결말에서 드러난 메시지는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보다 하루키의 메시지가 명확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외에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그 본연의 매력이 가득하다.


하루키의 작품은 의례 “하루키스럽다”로 쉽게 서술된다. 하루키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정형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형용한다 해도 크게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내가 하루키를 읽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지금 내가 느낄법한 감정, 일상, 생각을 모두 꿰뚫는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지금 당장 내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보편성이 담겨 있다. 하루키는 보편성에 읽는 나를 담아 모험의 세계로 보내버린다. 하루키가 선사하는 모험의 세계는 일상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일상의 모습을 한 판타지이기 때문에 그 모험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극에 달한다. 하루키의 작품을 단순히 “하루키스럽다”만으로 한정되기엔 아쉽다. 세상에 수많은 작가가 있지만 나는 아직도 하루키만큼 청춘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작가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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