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

불혹잡이 6편 / 세상의 시간표 대신, 나만의 리듬을 만든다

by 호미오

시간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렀다. 벌써 40이 되었다. 40이.

앞으로 50, 60, 70이란 숫자들을 모두 맞이할 테지만, 4는 좀 다르지 않나. 10대, 20대를 거쳐 30대까지 거치면서도 늙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제 나이 좀 먹었네” 정도였을 뿐.

그러나, 장년층 독자분들 께는 민망한 말이긴 하지만, 40대는 다른 것 같다. 옛날이었다면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인 것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처음으로 ‘늙은 사람의 삶'의 초입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시간 참 얄밉기도 하지만, 나를 잘 키워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원망보다는 희망을 갖기로 한다.

이 불혹의 시점에서, 시간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해야 인생 2막을 효율적이고 순조롭게 펼쳐낼 수 있을까.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 7일, 1년이지만, 그 흐름에 대해서는 개개인마다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기보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는 쫓기듯 지낸 세월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더 길었다.

마치 집이 점점 더 커져도 충분히 넉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알게 될수록 더더욱 무지함을 자각하게 되는 것처럼,

40년이라는 충분히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세상일은 아직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리고 그 만만치 않음은 시간의 흐름을 더 인식하게 만들었다.

느긋해질 때도 되었다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더 이뤄야 하니까, 더 가져야 하니까, 더 증명해야 하니까 더 쫓기듯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근데 그것이야말로 착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40 즈음해서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왜 내 시간은 항상 부족했을까?

앞으로 내 관점이 조금은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 내린 결론은 이렇다.

타인이 그린 시간표에 맞춰서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사회, 집단, 체제, 혹은 영향력 있는 어떤 인물, 그 무엇이든 간에, 그 혹은 그 시스템만을 위해 고안된 시간표에 따르고자 사람들은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옷, 가구, 음식... 이런 것들 전부 자신에게 맞게끔 변형하여 사용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시간은?

몸에 작은 옷은 답답해서 못 입는다. 아니, 안 입는다. 너무 호화로운 가구는 정신 사나워서 싫고 무지의 단색 가구가 좋다. 이 음식은 너무 매워서 나는 못 먹어. 아니, 안 먹어... 더 이상의 예시가 필요할까?

유독 시간만 자기 취향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대표적인 이유로 꼽는 것이 시간이다. 그 정도로 중요한 시간을 나는 어떻게 대했는가?

내 마음속 시계가 타인의 시간표에 연동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심하지 못했다. 시계를 벗을 수도, 재설정할 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표를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리 만무하다. 시계를 잠시 벗으려 동작만 취해도 바로 손가락질을 당하니까.


모두 같은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똑같은 방식으로 흘러가야만 하는 그 시계에 나라는 거대한 우주를 끼워 맞추고 살았으니 시간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어떤 이들은 시간이 남아돌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본인이 직접 그린 시간표에 연동되어 있지 않은 시계를 차고 있다면, 그 상대적 빠름이 나름대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10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30년 정도 노력하고 나서야 학문의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열리는 사람이 있다.

일주일만 수영 배워도 웬만한 영법은 자연스럽게 익히는 사람이 있고, 6개월 내내 연습해도 자유형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도구를 갖고 태어났다.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이룰 수 있다고 믿지만, 사람마다 특정 능력이 발현되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비상구가 하나밖에 없는 건물에서 탈출하듯이 좁은 문 하나를 뚫고 나가려 서로 짓밟고 아우성치는 모양새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20살에는 이것, 30살에는 저것, 40살에는 그것… 모두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흐름에 제대로 맞추지 않는다면, 사회로부터,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기에, 시계를 벗을 수도, 시간표를 스스로 만드는 것도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미움받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이러한 현실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달라지는 것을 극도로 어려워하는 사회.


여기에 힌트가 있다.

언젠가부터 '미움받을 용기'가 자존감의 핵심 원천으로 여겨진다. 타인의 나에 대한 미움을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그것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시계를 벗었다. 주변의 손가락질, 무시, 질책이 시작되었다. 화도 나고 안타까웠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나만의 시간표를 그려보았다. 여러 현재가 모여 또 다른 지점의 현재를 만들어내기에 궁극의 완벽한 시간표는 없다. 그저 지금 생각했을 때 가장 나에게 맞는 시간표를 그려볼 뿐.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표에 연동된 시계도 착용했다. 내 삶과 가치관에 맞춰진 시계를 보며 생활하니 쫓길 이유가 없다.

보람되고 충만한 일이 점점 늘어난다.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된다. 이 긍정 사이클은 나를 더욱 성장시킨다.

그렇게 되어감에 따라 무언의 비아냥을 퍼붓던 주변 사람들도 나를 다시 보게 된다. 다 함께 '똑같은' 시계를 차고 옹기종기 모여서, 나를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어?? 쟤 왜 잘 살아가지?

답을 해봤자, 설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안다. 손가락질이 시작되었을 때 초인적으로 인내해야 했던 그때처럼. 다만 미소와 친절로 되갚아준다.

그들 중 일부는, 시계를 풀거나 조금 자기에게 맞게 조절해도 되는지 의문이 시작된다. 심지어 나에게 살짝 와서 물어보기까지 한다.

가족들은, 아직도 전혀 이해 못 하는 얼굴이지만, 뭐가 뭔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잘 되었다는 표정이 기존의 무시하는 표정에 섞여 들었다.


흘러가는 시간은 7시가 뭔지 모른다. 금요일이 뭔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전부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다.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 이틀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불편한 직장 동료와의 2시간은 하루보다 긴 것처럼 천천히 흐른다.

모두에게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흐르고, 그것을 디자인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그래야만 한다.

교육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다. ‘스스로 시간표 짜고 시계 만드는 법 가르치기'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동일한 한 가지 시계의 조작 방법만 알려줬을 뿐 ‘교육'은 시켜주지 않았다.

외부로 탓을 돌릴 생각은 없다. 내 모자람도 컸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행히도 스스로 셀프 재교육을 하게 되었고, 성공적이었다.

40이 되어서야 다시 태어난 나를 칭찬하고 축하한다.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최초의 의심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기에.

앞으로 시간표의 부분 부분이 조금씩 수정될 테고, 시계의 세팅도 업데이트되어가겠지.

그러나 이제 자신감이 넘친다. 내 리듬에 맞는 시계를 찾았기에 이제 시간은 나의 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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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조하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똑같이 흐르지는 않는다.

불혹이든 지천명이든 20대든, 이제 모두가 자신만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흔들리지 않는 리듬. 아니, 가끔 흔들리더라도 금방 중심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런 자기만의 시간 감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