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이 순간을 채우자
가끔 산을 오른다.
산행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은, 풍광이 아름다운 산을 좋아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객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되기도 한다.
그중에 많이 들리는 말이 있다.
‘얼마나 더 가야 돼?’, ‘정상 별로 안 남은 거 맞아요?’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반강제로 산을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빨리 정상을 찍고 집에 돌아가는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건 바로, 산길을 내딛는 발자국 하나하나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운 흙, 매끈한 바위, 정처 없이 뻗어 있는 나뭇가지의 멋진 풍류. 이런 것들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정상에 있는 게 아니었다. 몇 시간의 산행 과정 자체에 포함된 것이었다.
깨닫고 나서 보니, 나의 그 옛적 태도는 최고급 커피를 시켜놓고 이쁘게 생긴 잔의 겉면만 핥아대는 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제는 안다.
시간을 충분히 두고 커피를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커피를 대하는 진정한 자세라는 것을.
그렇게 진심으로 음미할 수 있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최고급 커피가 된다는 것도.
또, 내가 즐기면서 마실 수 있는 커피라면 어떤 잔에 담겨 있든 내 눈에는 가장 멋진 잔으로 보인다는 것과 남들도 어느새 그렇게 여기게 된다는 것, 그리고 종내에는 나 스스로 또 다른 멋진 잔에 담아보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산을 오를 때 정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도착하면 되돌아오는 반환점' 정도로 여긴다.
빨리 찍고 내려가고 싶다거나 정상에서 사진 찍는 것을 목표로 삼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내쉬는 숨, 공기의 맛, 다리의 감각, 발바닥의 촉감, 구름, 나뭇가지 등에 집중한다.
나의 어떤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몰입하면 즐기게 된다는 거다.
즐기면 만족하게 된다. 만족의 지속은 충만감이다. 충만감은 뿌듯함으로 이어진다.
내가 산행에서 지치지 않는 이유, 가끔은 숨이 차오르더라도 힘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산행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에 초점을 두는 것의 이 놀라운 힘은 삶의 전반에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확신한다.
정상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의 과정 자체를 즐기며 나아간다면 어느덧 정상에 다다를 것이라는 것과, 그 길 위에서 지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것 하나. 현재를 더욱 진하게 만끽할수록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상은 더욱더 멋있는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것.
오늘도 나는, 방금 찍은 발자국이 뿌듯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