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좋은 책은 아니었다. 그저 평소의 독서와는 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을 뿐, 문장이 유려하거나 엄청난 반전이 머리를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흔하디 흔한 중국 고전인 노자의 도덕경을 해석한 책이었지만 오늘따라 마치 노자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기분이 묘했다. 노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느껴졌고, 고민하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안심했다.
평소에 읽던 책과 다르게 다가온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미 내 도서 목록 속에 비슷한 책이 많이 들어있었으므로 책 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아니었다. 휴가를 쓰고 혼자 카페에 앉아 진득하게 독서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한몫 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종종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곤 하기에 이것도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요즘 이런저런 고민거리들로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그저 약해진 마음이 스스로 위로받기 위한 글을 찾아낸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계기와 마주한다. 책을 읽을 때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 아이를 목욕시키면서, 운전하면서 화를 낼 때. 이 모든 순간에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단지 계기를 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계기의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계기를 놓치지 않는 마음의 준비가 중요하다. 차를 사고 싶은 사람은 길에 다니는 차만 눈에 들어오고,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사람은 길가에 고양이들만 신경 쓰듯 계기를 포착하기 위한 예민한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 마음가짐도 연습이 필요하다.
예민한 마음의 준비 없이 계기만을 기다렸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엄청난 사건이 내 앞에 나타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주리라 기대하며 살아왔다. 당연하게도 그런 대사건은 인생에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포착할 수 있었던 아까운 계기들을 무심하게 넘겨버렸다. 평탄하고 심심한 운명을 탓하면서 살아왔다.
오늘은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책도 카페도 음악도 커피맛도 예전과는 달라진 느낌이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세상을 누비던 20대 초반에도 비슷한 느낌을 느꼈다. 당연하게 보지 않으면 당연하지 않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