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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Jun 17. 2021

“세상만사 다 장단이 있다.”


요즘은 세상만사 다 장단이 있다는 생각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힘든 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며, 나는 어떤 준비도, 대처도 하지 못한 채 맞이하게 된다. 때로는 그 크기가 너무 커 차마 하루, 이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꼭 떠올리는 생각이 있다. 세상엔 마냥 좋은 것도, 마냥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교적 크게 흔들리지 않는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좋은 일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나쁜 일이 주는 불행함의 정도가 행복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거의 대부분 도움이 된다.


돌이켜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은 언제나 단선적이었다. 인생이란 것이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선형적인 과정인 것처럼 여기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나온 선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앞으로 가야 할 멀고 먼 미지의 선만을 동경하고 또 애달아했다. 내 뒤편의 선은 실수와 미성숙, 가난과 찌질함으로 점철된 풍경이었으며, 앞에 펼쳐진 선만이 비록 아득하지만 성숙하고 완성된 모습이었다.


남들을 대할 때도 이런 태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내가 과거에 했던 생각이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것이 내 과거처럼 미성숙하다고 여겼다. 그도 언젠가 나처럼 생각하게 될 거라고,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고 나에게 더 큰 상처로 돌아왔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힘이 빠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인생이 단선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 스스로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다시 믿게 되기도 했으며 과거의 불행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지금 당장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누군가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단지 다른 삶이라고, 저 삶에도 장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스스로를 객체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형적으로 인생을 바라봤을 때는 완전한 1인칭 시점으로 나를 평가했다. 세상의 중심은 나였으며, 나한테 좋은 게 좋은 일이고, 나에게 나쁜 건 나쁜 일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은 참지 못했다. 특히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내가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일종의 메타 시선을 가진 느낌으로 살아간다. 숙제 강박에 휩싸여 사는 나라는 사람이 측은하기도 하고, 여유롭고 따뜻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조언까지도 하고 싶어진다.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시간일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평생 가지고 살아온 단선적이고 편향적인 생각이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생각이 들 때는 모든 일에 장단이 있다는 긍정적인 자기 위로를 하다가도, 내가 조금만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 싶은 순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월감에 도취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더라도 계속 연습해나가려 한다. 인생에서 언젠가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할 때가 분명 올 테니까 말이다. 바로 그때, 얼마나 연습되어 있느냐가 외력을 이겨낼 수 있는 내력의 크기를 결정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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