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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May 03. 2020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뒷발을 떼야한다

인디언 속담 중 좋아하는 게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뒷발을 떼야만 한다.”


이 속담이 왜 좋으냐면,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분야라서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긴 한데 당최 갖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 없는 성격이라 서다. 세상에서 포기하는 게 제일 힘들다.


또 왜 놓아버리는 걸 못하는 성격인지에 대해 답해보자면, 집안의 장남으로 자라서 그렇고, 부인과 자식이 딸려 있어서 그렇고, 대기업에 다니는 게 아까워서 그렇고, 대출금이 많아서 그렇고.... 등등 겁쟁이들이 흔히 하는 상투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창업을 결심하고 동업자와 의기투합 한 건 2018년 6월이다. 둘 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짬을 내 준비를 하고 금요일이나 주말 밤에 만나서 새벽까지 회의를 하곤 했었다. 무려 1년 반 동안 준비를 했지만 진전은 거의 없었다. 회사와 육아에서 체력을 다 쓰고 방전 직전의 상태로 만나봤자 네, 다섯 시간이 지나면 온전히 생각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오락가락한 정신상태까지 되면 그제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좀 더 생각해보자는 말로 자리를 파하곤 했다. 보통의 창업자들이 하루 20시간씩 몰두하면서 일하는 게 당연한 현실이니 우리 창업이 진전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가 비슷한 서비스가 우리보다 먼저 출시됐다는 소식에 방향을 수정하기도 하고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동생과 다른 사업을 해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시간은 흘렀지만 결과는 모두 흐지부지였다.


시간이 모자란 건 당연한 거고, 회사에 한 발 걸쳐놓고 있어 마음이 절박해지지 않는 것도 성과가 나지 않는 이유였다. 하지만 더 솔직한 이유를 들어보자면 “이게 진짜 될까?”하는 의심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회사를 다니는 나’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회사로 향했고, 익숙한 자리에서 당연한 일들을 처리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매달 받고 있었다. 통장에 박히는 숫자는 이게 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다. 하지만 ‘사업하는 나’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당최 아무것도 없었다. 사업자 등록도 하기 전이라서 행정적인 면에서도 그랬을뿐더러 단 한 번도 수익을 발생시켜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학 시절에 팀원들끼리 모여 조별 과제를 하던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가상’.


가상이라는 생각이 들면 머릿속에서 ‘목표’는 점점 희미해지고 ‘사업을 하는 과정’ 자체만 즐기게 돼버린다. 나는 여느 회사원들과 달리 사업을 준비하며 더 큰 앞날을 내다보고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 혼자 만족하면서 진짜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힘들고 지루한 임무들은 덮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서 빠져나오는데 자그마치 1년 반이 걸렸다.


고백하자면 치사하게도 아직 회사를 그만두진 못했다. 육아휴직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회사를 잠시 쉬고 있으며, 부모님에게까지 숨기면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남자로서 육아휴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을 진급과 같은 보상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통지로 받아들인다. 그 와중에 동업자는 나보다 일찍 회사를 그만둬버리고 집 옥탑방에 사무실을 차렸고 그 한편에 내 자리도 마련됐다. (월세가 없는) 사무실이 생기고 매일 아침마다 출근을 하니 이제야 창업이 ‘가상’에서 ‘현실’로 바뀐 듯하다. 지금은 회사를 쉰 지 딱 두 달이 돼가는 시점. 두 달 동안 매일 동업자와 얼굴을 마주하면서 지난 일 년 반 동안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진척을 이뤄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결과물이 나올 때마다 창업은 점점 더 현실이 되어 나를 이끈다.   


이제 와서 왜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답해보자면 난 아직 젊고, 아내가 돈을 벌고 있으며, 자식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조금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었고 등등 어울리지 않게 용감하고 있어 보이는 대답이 술술 나온다. 결국 세상은 내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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