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나다움 ‘나설 수 있는 용기’

칭찬에서부터 시작된 나서는 연습

by 연재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도 '화장실 다녀올게요'라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바지에 오줌을 싸고 집에 치마를 입고 오던 유치원 시절의 나는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진 어린이 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처음으로 손을 들고 발표를 한 나에게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칭찬은 나에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연재는 잘 하니까” 라는 그 말 한마디.


소풍날과 수련회가 되면 친구들과 팀을 결성해 1세대 아이돌의 K-POP에 맞추어 댄스경연에 나섰고 그 인기에 힘입어 전교 어린이 부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구멍 난 양말을 손에 끼고 '이 양말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외치던 나는 아침 조회 시간 사회자 역할이라는 유일한 부회장으로서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에 새로 생기는 창작 연극부 모집 소식을 보고 지원했다. 우리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짜고 우리들 스스로 연출, 배우, 스탭이 되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본다는 매력적인 유혹에 이끌렸다. 연극반의 이름은 '페르소나'였고 우리는 매 작품을 우리 이야기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재미에 매혹되었다. 만화책 '유리가면'에 나오는 장면처럼 연극반 형과 동기들은 운동장을 뛰며 발성 연습을 하고 연극반 바닥에 누워 다리를 들며 복식 호흡을 익혔다.


내가 연극반에서 맡은 첫 번째 배역은 '검은 천'이었다. 10대의 성을 다루는 극 중 이야기에서 주인공 남학생이 성적인 이끌림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장면을 가시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극의 백미를 보여주는 역할이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나는 주인공 친구의 대사에 맞추어 나만의 바이브로 폭발할 듯한 10대의 성적 에너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자지러지는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검은 천 안에서 내가 느낀 '해소'의 감정은 이후 내게 진한 현자타임을 선사했다.


연극제 무대에서 유일하게 창작극을 올린 '페르소나' 멤버들은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창작극을 하는 연극반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의 창작극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은 그 시절 우리의 갈등과 고민, 꿈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꿈은 '내가 만든 이야기로 창작하는 삶'이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밴드부에 들어갔다. 유명한 밴드의 곡들을 카피하는 스쿨밴드에서 나는 엔지니어였다. 그 시절 엔지니어의 역할은 멤버들의 합주를 모니터링하고 공연 현장에서는 조명이나 음향을 담당하며 공연을 기획하는 전반적인 매니저의 역할에 더 가까웠다. 옥상에서 무대 배경을 장식할 천에 그림을 그리고 티켓을 디자인하고 포스터를 제작해 학교 곳곳에 붙이고 공연을 열었다.


동시에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모이는 광고연합동아리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한양대, 동국대, 서강대, 이화여대 서울 곳곳의 대학교 강의실에서 광고계 뉴스에 대한 스터디와 네트워킹 파티가 벌어지는 동아리에는 대문자 E의 극도로 외향적인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대체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출석은 준수했고 어쩌다 동아리의 홈페이지와 영상 작업을 담당하는 임원을 하기도 하고 광고전시회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젝트팀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교내 동아리 밴드부와 연합 광고 동아리 활동은 때로 MT일정이 겹치기도 했는데, 나는 가평의 밴드부 MT에 갔다가 이튿날 양평의 광고동아리 MT에 합류를 하는 방식으로 동아리 생활에 매진했다. 대학교 등록금을 내고 2가지의 힘든 동아리 활동을 빠짐없이 하느라 학부 성적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광고전시회에 밴드부 친구들을 초대하고 밴드부 공연에 광고동아리 친구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대통합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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