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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Dec 18. 2020

나만의 타이밍이 있을 거라 믿었다, 분명

나의 이십대 초반은 후회 덩어리의 집합이었다

   대학 4년과 해외 생활을 포함한 휴학 2년, 놀 때는 참 좋았다. 대학 생활을 하는 6년 동안 임용고시의 ‘임’자도 몰랐다.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은 선생님의 존재를 지각한 여섯 살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등등 내 꿈은 늘 그 자리였다. 대입을 앞둔 고3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내 점수로는 희망하는 사범대학을 지원하기에는 아슬아슬하다고 했고, 교직이수에 대해 알려주셨다. 목표는 언제나 교사였기에 어디로 가든 교사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교직이수를 생각하고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자 재밌어했던 역사를 전공으로 삼기로 했다. 사학과에 입학해서도 교직이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적으로 10% 즉 3명만 할 수 있는 교직이수를 9등 즈음 하는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교직이수를 하면서도,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교직이수를 하는 것만이 임용과 관련된 모든 일이었다. 임용고시가 어떤 시험이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찾아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고서야 맨땅에 헤딩하듯 임용 바닥에 뛰어들었다. 4년 동안 사학과에서 배운 전공지식은 이미 내 머릿속 지우개로 지워진 지 오래였고, 교직이수로 배웠던 교육학과 역사교육론도 모두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상태였다. 이미 사범대 학생들은 4년 동안 이렇게든 저렇게든 임용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텐데 나는 스물다섯 겨울에서야 찾아보기 시작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부랴부랴 교육학 인강을 수강하며 하나씩 머릿속에 집어넣기 시작했고 임용 필독 전공서적도 없는 것들이 많아 그제야 하나씩 사서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역사는, 대학에서 배웠던 역사는 손톱의 때 만큼이었고 여전히 아직도 봐야할 책도, 분야도 많았다. 공부를 하면서 드문드문 알던 서양사를 처음으로 다 훑었고, 처음으로 중국사, 서양사 이외의 일본사, 베트남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맨 땅에서 시작한 공부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어떻게 시작해야할지도 몰라 책을 베껴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초반 1년은 시행착오가 많았다. 고3이후로 5년이나 지나서 시작하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당연히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뭔가 머릿속에 남기는 하는 건지 멘탈이 흔들리는 건 비일비재했다. 흔들리는 멘탈의 끝은 내 과거 부정으로 넘어간다. 희망하는 사범대학 말고 성적에 맞는 사범대학이라도 갈걸, 대학 4년 동안 대학공부나 대외활동 말고 임용 공부나 할 걸, 2년 휴학하지 말고 해외 나가지도 말고 공부나 할 걸, 대학생활 하지 말 걸. 나의 이십대 초반이 후회 덩어리의 집합이었다. 먼저 임용이라는 이 가시덤불에서 탈출한 선배나 함께 의지할 수 있는 동기도 없었기에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었다. 그저 임용고시 준비 카페를 들락날락 거리며 여러 합격 수기를 읽으며 나만의 방법을 찾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공부에는 왕도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고 꾸준히, 성실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면 언제가 되든 볕은 뜰 거라고 넘기고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제자리걸음이라고 느낄 때는 세 번째 시험을 치루고 나서였다. 건너 건너 같은 과 후배가 타지역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처럼 일반대학 교직 이수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선후배동기들이 몇 없기도 없었지만 한 번쯤 수업을 함께 들었던 적이 있던 후배였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보다 두어 살 어린 후배가 휴학 한번 없이 임용고시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던 모습이 떠올라 먼저 붙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공부했던 스터디원의 합격 소식을 들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다 각자만의 사정과 환경 속에서 임용고시 공부를 했겠만 이 후배의 합격 소식은 나만 유독 제자리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의지할만한 선후배동기도 없는 외로운 교직 이수생으로서 그렇게 한 발 빠르게 먼저 이 지옥불을 탈출한 것이 부러우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그 어디에다가도, 누구에게도 후배가 먼저 합격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듣는 이도, 말하는 나도 ‘근데 너는? 같은 교직 이수생인데 너는?’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애써 올라오는 감정들을 모른 척하곤 했다. 그렇게 또 한 해를 더 버텨냈다. 버티다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타이밍이 있는 거겠지. 그때는 그 후배의 타이밍이었고, 언젠가 나의 때가 있겠지.’ 좌절은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부러움은 또 다른 부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좌절하고 부러워하고, 그렇게 내가 만든 틀에 멈춰있을 수만은 없었다. 때로는 회피가 정답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타이밍’을 찾으며 여러 감정을 모른 척했다. 때론 모른 척, 회피가 답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합격 소식이,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쓰디쓰고 쓰라릴 수도 있겠다는. 내가 4년을 기다려보니 알겠더라. 결국 때가 온다. 각자의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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